귀하고 값진 습관
거의 다 써서 납작해진 치약튜브를 볼 때면 그 때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나는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할머니는 물건이나 옷, 양말을 꼬메입고 오래쓰는 건 기본이고, 물이나 전기도 알뜰살뜰 절약하며 쓰셨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어려서 그런가보다- 하며 자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습관 때문에 엄마가 여간 피곤한게 아니었을 것 같다. 해가 지고 어수룩해지는 저녁이 오면 응당 불을 켜는데, 꼭 할머니는 거실불은 티비를 켰으니 안켜도 된다고 끄시고, 식탁에서 식사를 할때도 엄마가 식탁등을 켜면 할머니는 아직 날이 환하다며 다시 끄셨다. 조명을 받으며 즐거운 식사 분위기를 즐기고싶은 엄마의 소소한 바람은 언제나 할머니의 off 로 정리되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쓰는 휴지의 칸수를 정해주셨고, 물도 모아쓰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나와 내동생의 행동을 교정할때 뒤에서 엄마는 안그래도 된다고, 깨끗이 쓰고싶은 만큼 쓰라며 몰래 말해주었지만,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자연스레 할머니의 습관을 닮게 되었다. 치약은 납작해지면 가위로 두동강을 내어 싹싹 긁어 이틀은 더 쓰고 버렸다. 발우공양을 하듯 치약을 싹싹 닦아내면 솔솔 나는 민트향 때문인지 기분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치약사건이 생겼다.
휴학을 하고 친구와 인도여행을 다니던 중이었다. 한달이 넘는 여정이었는데, 여행 막바지에 가지고 온 치약이 튜브가 납작해져서 꾹꾹 눌러도 안나오길래 가위로 자르고 있었다. 그 때 친구가 내 모습을 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더니, 너 엄마들이 하는 것처럼 왜그래~? 그거 새로 사면 되지! 하며 깔깔 웃는 것이었다. 버려 버려~ 내꺼 줄께 하며 통통한 새 치약을 건네주는 거다. 아니야~ 이거 잘라쓰면 딱 알맞게 떨어지는 양인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살림잘하는 엄마들 같다면서 하도 웃길래,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가위로 자른 치약을 쓰지않고 버렸다. (그 때 처음 그렇게 치약을 버려보았는데) 왠지 나는 내 나이에 맞지않는, 굉장히 촌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뒤로 친구들의 행동을 살펴본 나는 깨달았다. 나처럼 깐깐하게 물건을 쓰는 애가 거의 없는 거였다. 코를 풀때도 휴지를 네장다섯장 두툼하게 쓰고 버렸고, 다 쓰지도 않은 물건들을 싫증이 났다거나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쉽게 버렸다. 과제가 많다는 이유로 컴퓨터도 일주일이 넘도록 안끄고 살고있다고도 했다. 왠지 이런 행동이 되게 쿨해보이는 거다. 그리고 편해보였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친구들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고, 집을 떠나 자취를 할때엔 더 마음대로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잠깐 몸이 편하긴 했지만, 곧 나의 내부에 콕 박혀있는 할머니의 습관들이 자꾸 떠올라 묘한 죄책감이 생겨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내 습관대로 돌아와 생활하곤 했다. 다만 그 모습들을 친구들에겐 보이지 않기로 했다. 20대의 나는 또 '엄마'같다느니, '할머니'같다는 등의 말은 듣고 싶지가 않았다.
코로나 이후 더욱더 불거진 환경문제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보면,
언제나 물건들을 귀하게 아껴쓰고, 제 소명이 다할때까지 쓰고 잘 버려야 한다는 것. 그것은 굉장히 값진 훌륭한 습관이었다. 물론 저녁 5시만 되면 불을 소등하며 살진 않지만 다시 치약을 두동강 잘라 쓰고, 걸레를 애용하며 분리수거도 철저히 한다. 잠깐의 인스턴트적인 방황이 사실은 내 몸도, 마음도 더 불편했다. 남아있는 내용을 다 비우지도 않고 쉽게 버리고, 또 그걸 처리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못내 불편하다. 내가 잘 쓴 만큼 잘 버리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오늘도 카페를 정리하며 일회용컵뚜껑채 일반쓰레기통에 버려두고 간 사람들을 떠올리며 분리수거를 한다. 사람의 품격은 그들이 쓴 물건의 값이 아니라 어떻게 버리고 갔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촌스럽고 느리고 불편한 습관이 요즘 세상에서는 귀하게 되었다.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세상에 보탬이 될 이 습관들을 계속해나갈때 나는 스스로가 뿌듯하고 개운하다. 귀한 습관을 물려주신 할머니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잘 쓰고 잘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