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엄마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지켜보며
우리나라 3대 거짓말 중 하나는 노인이 "죽고 싶다"라고 하는 말이다. 80이 넘은 우리 엄마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대신 자주 하는 비슷한 말이 있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봐.
"내가 죽을 때가 됐는지 자꾸 식은 땀이 나."
"내가 죽을 때가 됐는지 입맛이 뚝 떨어져."
"죽을 때가 됐는지 기운이 없어."
본인의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을라치면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죽을 때가 됐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놀라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병원에 가보자고 권유도 하고, 한약을 드시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런 말들도 가려서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봐"
진짜 몸이 안 좋으신 때도 있지만, 살짝 컨디션이 떨어지는 날에도 걱정으로 부풀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후자라고 생각될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물론 그러다 엄마가 서운해 하시면 눈치껏 대답해 드려야 한다.
그러다가 내 몸이 안 좋은 날 "죽을 때가 됐나 봐"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좀 짜증이 나서 "엄마 나이 때 팔팔한 게 이상한 거지. 그만큼 안 아픈 게 더 이상하구만" 하고 쏟아버릴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어찌나 서운해 하시던지... 엄마에게 손이 닳을 만큼 싹싹 빌어야 했다.
나 역시 갱년기 나이를 지나며 각종 질환이 이어달리기처럼 계속되고 있다. 엄마의 반복되는 하소연을 마냥 받아줄 여유가 별로 없는 이유다. 한편으론, 나는 아직 50인데도 이렇게 아픈데 80이 넘은 엄마는 얼마나 아플까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다시 세상 둘도 없는 효녀 모드로 전환하곤 한다.
"엄마, 나도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얼마나 아프겠수?"
이 한 마디에 엄마는 '기회는 이때다' 하며 각종 증상 보따리를 풀어내시곤 하는데, 그때의 엄마 표정을 보면 아프다는 걸 알아드리는 것만도 작은 치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죽을 때가 됐다'는 엄마의 말은 나에게 아무런 데미지를 주지 못하지만,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따로 있다.
"엄마 죽으면... 저기 뿌려줘."
엄마와 종종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가곤 했는데, 유난히 주황색 꽃이 예쁘게 피는 나무가 있었다. 엄마는 봄마다 그 꽃을 핀 나무를 보며 예쁘다고 좋아하셨다. 그러더니 3년 전인가. 같이 그 앞을 지나다가 느닷없이 그 나무 아래 뿌려달라고 하셨다. 예전에 아빠가 돌아가신 뒤 화장할 때 엄마도 화장해달라고 하셨던 터라 이유가 궁금했다.
"너희 아빠 그냥 화장터 있는데 뿌리니까 나중에 후회되더라. 속상한 일 있을 때 가서 찾아갈 곳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너희가 나중에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아."
엄마는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자식들이 힘들 때 찾아와서 울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품을 남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울컥해서 산통을 깨고 말았다.
"여기다 뿌리면 불법이거든요."
엄마가 사라지는 삶.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엄마의 생각은 또 바뀌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난 수목장으로 해줘" 하는 게 아닌가. 화장을 해서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거였다. 불법도 아니고, 찾아보니 접근성도 좋고, 비용적인 부분도 괜찮고, 우리도 언제든 가서 엄마를 기릴 수 있는 좋은 방법 같았다.
"그래. 엄마. 그게 좋겠다. 소나무 좋은 걸로 해줄게."
죽음과 삶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엄마
엄마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목구멍으로 뜨거운 게 올라오는 시기는 지났다. 아빠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보내드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오히려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준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긴다.
엄마는 이미 자신의 통장과 비밀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서 서랍에 넣어 놓고, 영정사진도 찍어서 분홍색 보자기로 싸 놓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엄마 나이 83세. 건강하게 90까지 사셨으면 하는 게 바람이나 엄마나 나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유한함이 '언젠가'라는 막연히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앞까지 왔음을 피부로 느끼는 요즘, 엄마와 나는 예전에 비해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밥을 먹고 나서도, 맛있는 음식을 배달해서 먹고 난 뒤에도, 분리수거를 한 다음에도, 마트에서 많은 짐을 들고 온 다음에도 종종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예전에는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새삼 고맙다고 여겨지는 탓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 없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됐지만", "내가 죽으면" 예전엔 안 들으면 좋은 말이라고 여겼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엄마의 저 말들은 소통하고 싶어서 혹은 자식들이 이제는 알아주길 바라며 내미는 푸념이자 소소하게 남기는 유언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잘 귀담아 들으려 하고, 아껴주려 하는데 내가 과했던 걸까.
"넌 나를 너무 과보호해."
독립적인 엄마는 아직은 자신의 역할이 있기를 바라신다. 그러면서 며칠 전 아침에는 또 익숙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죽을 때가 됐는지 아침에 못 일어나겠더라구."
그러더니 엄마는 굳이 자신이 아침을 하겠다고 하셨다. 점심 때쯤 답답하지 않으실까 싶어서 "오후에 공원에 산책갈까?" 하고 물으니 냉큼 "그래. 이럴 때일수록 다리 운동해야 해" 하며 좋아하신다.
어디 그뿐인가. 죽을 때가 됐다는 양반이 어제는 좋은 꿈을 꿨다며 로또 두 장을 사셨다. 당첨 되면 뭐할 거냐고 하니까 "나도 다 쓸 데가 있어" 하면서 말씀을 안 하신다.
어떤 날은 죽을 때가 됐다고 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며 죽음을 준비하고, 어떤 날은 다리 운동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려 애쓰시는 엄마. 두 마음 사이를 오가며 종잡을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를 잘 정돈하고 유쾌하게 사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