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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Oct 05. 2023

리뷰의 여왕이 쓴 리뷰

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를 읽고..

문하연 작가는 제가 공식 인정하는 리뷰의 여왕이에요.  

너무 정성스럽게 써준 고마운 글이라 공유합니다.




한참 글을 쓰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인다. 나의 부친이시다. "막내딸, 잘 있었는가?" 누가 보면 꽤 오랜만인 것 같지만, 부친과 난 매일 통화한다. 부친이 말 상대가 필요해 전화 걸었다는 걸 알기에 웃으며 "네" 하면 부친은 본격적으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날씨 이야기로 시작한 주제는 어제 점심은 뭘 드셨는지, 아픈 엄마의 건강 상태에 관한 소식, 마트에 한우가 세일한다는 뉴스, 방안 기온이 현재 몇 도인지 시시콜콜 이야기 하다가 뭔가 할 일이 생각나면 급작스럽게 툭 끊어버린다. 특별한 것 없는 하루기에 난 늘 적당히 리액션하다 끊긴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부친은 뭔가 마땅치 않을 땐 "틀렸어", 강조하고 싶을 땐 "참말이여"라는 말을 자주 하시고 특히 급으로 나누는 걸 좋아한다. 우리 4남매는 부친의 이런 말투를 종종 따라 하는데 언니가 해온 반찬이 맛있을 땐 "A급이네, 참말이여!" 하고, 맛이 별로면 "틀렸어! C급도 안 돼" 하는 식이다.

'참말이여'와 '틀렸어'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쓸모(?)가 있어 이 두 마디로 대화가 통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된다. 마치 '거시기네 집에 거시기한 일이 생겨서 거시기했어!'라고 해도 무슨 거시기인지 다 아는 경지랄까.


그렇다고 부친이 늘 A급만 선호하진 않았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A급 언니 오빠보다 이도 저도 아닌 C급인 나를 더 챙기셨으니까. 아마 A급도 살기 힘든 세상에 C급인 내가 앞으로 어찌 살지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올해, 만 팔십이 되신 부친은 부쩍 행동이 굼뜨고 어둔해졌다. 지금까지 아픈 엄마를 돌보시고 손수 밥을 지어 드시는데, 언제까지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으로 장을 봐서 보내는 거다.


쌀과 각종 밀키트, 과일, 간식까지 부친이 그때그때 원하는 걸 보내드린다. 자주 못 가서 죄송하기만 한데 늘 "네 덕에 산다 고맙다"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시고 명랑하게 사시는 걸 보면 내가 더 고맙다.

어렸을 땐 부친은 우리 네 남매를 앉혀 놓고 야바위를 선보이며 우리가 틀릴 때마다 꿀밤을 먹였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꿀밤을 맞으면서도 또 하자고 졸랐고 또 낚였다. 눈에 빤히 보면서도 속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부친이 얼마나 고소한 표정으로 우릴 보시던지, 아직도 그 미소가 눈에 선하다. 가정적인 부친은 집안일이며 육아며 경제 활동까지 성실했다. 우린 부친의 성실함에 기대 착실히 자랐다.


흥도 많은 부친은 주말에 이불을 대야에 담가 발로 밟아 빨 때도 전축에 팝송을 크게 켜 놓고 따라불렀다. 영어를 전혀 몰랐지만 따라부르는 데 문제 되지 않았다. 특히 '크레이지 러브'라는 곡을 잘 불렀는데, 댄스곡이 아님에도 그 또한 부친의 막춤을 막지 못했다. 우리가 모르는 구구절절한 러브가 부친을 크레이지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참, 한 맺힌 몸동작이었지 싶다. 더 늦기 전에 내 친애하는 부친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은데, 마침 그런 책이 나왔다.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일상을 담은 책, <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이다.



두 여자가 어깨를 기대고

              


     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                                                   ⓒ 자음과 모음



방송작가인 저자는 비혼으로 엄마와 함께 지내며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엄마와의 일상을 기록했다. 두 여자가 함께 어깨를 기대 살아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나는 특히 저자 모친의 언어들이 좋았다. "사람이 나쁜 일만 생기지 않아, 아무리 큰 어려움도 십 년은 넘기지 않는단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쌀로 밥 짓는 소리"처럼 뻔하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기에, 지난한 삶을 관통한 힘을 가졌기에 그의 언어는 보석 같다.


 

방송국에서 막 잘리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나 일이 너무 안 풀린다고 생각될 때 엄마는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와" "끝을 잘하고 나와야 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마무리하고 나오란 뜻이었다. 그땐 엄마의 그 말이 참 와닿지 않았다. 내 나이가 이렇게 많으니 견디기만 하다 좋은 날이 오기도 전에 할머니가 돼서 내 인생이 '쫑'날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의 저변에는 '난 이렇게는 못 살아' 하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릴 부정하니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그놈의 좋은 날은 도대체 언제 와? 다 늙어서 오면 뭐 해?"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냥 견디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좋은 날'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날인지도 헷갈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란 좋은 날이란 보란 듯이 잘 사는 삶이었던 것 같다. 잘 안 풀리고 시들거리는 내 자존심을 세워서 번듯한 자리로 인도해주는 역전승 같은 삶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날을 바랄 때는 내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내 마음속에 일던 폭풍이 잠잠해지고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행복을 느끼는 빈도가 늘었다.

바로 그게 내가 바라던 좋은 날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방송국에서 일할 일은 없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고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해서라기보다 서로 끝이 좋았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와" 내가 어딨는지 알 수 없었던 백수 생활 때, 나만 낙오되고 소외되고 뒤처진 느낌이 들어 괴로웠을 때 엄마의 이 말은 공허하게 들렸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삶의 최선을 다하면 그 시간은 버텨진다. (중략) 그렇게 버티다 보니 좋은 날에 이르렀고 돌이켜보면 그때도, 지금도 좋은 날이다.  - 132~134p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고 간절히 바라도 안 되는 일도 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간절함이 덜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퇴로를 찾자. 그 퇴로가 우릴 어디로 데려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건 안 되더라도 너무 좌절하지 말라는 뜻이고, 퇴로라고 생각했던 길이 또 다른 고속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고, 힘을 빼는 순간 또 다른 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길도 길이고, 저 길도 길이다. 그리고 길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길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꿈이야 이뤄지든 말든 놓아두자. 이건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내게 하는 다짐이자 어느 순간에도 주저앉지 말라고 나를 다독이는 말이다. 그래야 모든 도전이 행복할 수 있고 매 순간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자기 직시의 힘



저자가 딱 마흔이 되던 해, 수많은 회사에서 광탈하고 겨우 구한 자리는 도넛 가게 알바였다. 나이 많고 고학력은 부담스러운 존재. 감사하고 기쁠 줄 알았던 첫 출근날, 지하철에서 내린 저자는 눈물을 흘렸다.



이내 일에 적응하면서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길 무렵 후배가 가게 앞을 나가는 것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늘 언니를 닮고 싶다는 후배. 그 말속에는 사회적으로 번듯한 모습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데서 일할 것 같게 생기지 않았다는 사장님의 말처럼 나는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이 계속 있었던 탓에 후배의 등장으로 비대하기만 할 뿐 뿌리가 단단하지 못했던 내 자아는 또 무너졌다. 내가 다다르고 싶었던 곳과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과의 괴리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닥친, 무서운 재난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할 때였다. (중략) 결국 나는 항복했다. 그러자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가 아니라 나라고 왜 아닌가?"라는 말이 내 마음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 102p
  


맞다. 왜 나라고 아닌가. 나라고 소나기를 피해 갈 수 있나? 말은 쉽지만, 정작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다. 저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몸서리치게 부대꼈을까 싶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건 과거 내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에서 알바를 끝내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모친이 강아지와 함께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모습에 저자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렸다는데 그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나도 울었다. 나이 들면 통장에 돈이 늘어야 하는데, 어떻게 난 눈물만 는다.



솔직한 자기 직시의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쳅터 사이사이 나와 내 가족의 관계를 돌아보게도 했다. 그리고 나의 A급 부친에 관해, 기록하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도 들었다. 참말이다. 부친께 전화해야겠다. 요새 입맛이 없으시다는데, 뭐 드시고 싶으신지 여쭤야겠다. 그리고 그때 '크레이지 러브'를 왜 그렇게 불러대셨는지도 이참에 물어야겠다.



또 명절이다. 긴 연휴에 가족끼리 고스톱 치다가 마음이 상하거든 이 책을 읽으며 내 부모, 내 동거인에 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맞고 상대가 틀려서 분한 마음이 들 때 '지금이 좋은 날'인 걸 잊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


https://omn.kr/25s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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