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7화
산에 오르는 길. 목적이 있어서 왔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산은 힘들면서도 기분 좋은 개운함을 선물해주었다.
걷다 보니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대궐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은 예쁘다고 감탄하면서 코스모스 밭에 들어가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전인 꽃받침 포즈, 누군가는 두 팔을 한껏 올려서 머리 위로 만든 하트 포즈, 누군가는 브이, 누군가는 그냥 뻘쭘한 포즈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누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했나. 난 꽃이 훨씬 예쁜데.’
소연은 자신이 피어야 할 때, 져야 할 때를 알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꽃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부럽다고 느껴졌다.
용천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회장이 소연과 나선에게 다가와 “오르기 괜찮았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좋았다고 대답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산에 오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 소연과 나선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왔다. 누군가는 마음을 달래려 오고, 누군가는 해방을 위해서 오고, 정복하기 위해 오고, 무언가를 털어내기 위해 오고, 정리하기 위해 오고, 기운을 얻기 위해 오기도 한다. 걷다 보니, 여기 온 사람들도 다 나름의 이야기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왔지만, 산행을 하다 보니 기분이 상쾌해져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깨진 건 식사할 때였다. 알아서 사먹는 게 규칙이었지만, 식당이 많지 않아서 어느 식당을 둘러봐도 산악회 회원들이 있었다. 소연과 나선은 그냥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산채 비빕밥과 도토리묵을 시켰다. 쑥갓과 갖은 야채가 들어간 도토리묵의 참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도토리 묵을 한 입 먹자 막걸 리가 자동적으로 생각난 소연은 옆 가게와 테이블을 슬쩍 봤는데, 이미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파란 두건을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오더니 두 사람에게 권했다.
“전 영등포 상가 번영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한잔 하시죠.”
소연은 속으로 여기서 영등포 상가 번영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뭐하러 말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전까지 막걸리가 당겼는데 그 남자와의 자리라 길어질까 싶어서 소연은 술은 즐기지 않는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옆에서 나선이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소연은 조용히 나선의 다리를 찔렀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엉덩이를 붙이더니 앉아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미 좀 취한 것 같았다.
말을 하는데 입술 양쪽으로 하얀 거품이 올라왔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그 사람의 이야기보다 그 거품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소연은 애꿎은 반찬만 들여다 봤다. 소연과 나선이 시큰둥하자 남자는 눈치를 보다가 “술 좀 돌려야겠다”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때 산악회 회장과 그 주변을 둘러싼 여성 회원들이 보였다. 한쪽에선 산악구조대를 했다던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남성이 먹을 곳을 찾고 있는 게 보였다. 나선이 얼른 “여기서 같이 드세요”하려고 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그 남성을 부르는 여성 회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조대 남자는 우왕좌왕하다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무안해진 나선은 올렸던 팔을 조용히 내렸다.
“여긴 그야말로 정글같아.”
나선의 말에 소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산행을 해서인지, 진짜 맛집이어서인지 소연과 나선은 밥을 맛있게 먹었다. 별 특별할 것 없는 비빔밥인데 더 고소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아저씨 한 명이 한 중년 여성 옆에 몸을 붙이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여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친구로 보이는 여성은 곤란했는지 애써 다른 곳을 쳐다 보고 있었다.
“아휴~ 이제 그만하고 저기 가서 밥 먹고 와요.”
여성이 몸으로 살짝 남자를 밀치며 말했다. 눈치 없는 남성은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저기 볼 일 없어~”하며 계속 몸을 여성에게 기대는 것처럼 밀착했다.
사귀는 사이인가 아니면 추근대는 건가.. 소연과 나선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남자가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나자 남성이 몸을 기댔던 여성이 말했다.
“아휴~ 너무 들이대네 그냥. 받아줬더니 끝도 한도 없어.”
그러다가 소연과 눈이 맞추졌다. 여성은 무안했던지 웃으면서 여기와서 만나게 된 사람이라면서 둘 다 돌싱이라는 등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난 그냥 친구같이 편하게 만나고 싶은데 저 아저씨는 자꾸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네.”
난처한 듯 웃었다.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는 말에 좀 당황이 되었지만, 이럴 땐 그냥 웃는 게 최고 아니던가. 소연과 나선은 눈은 웃고 입으로는 기계적으로 “아하하하하”하고 웃고는 다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거의 다 그릇이 비워갈 무렵, 잠시 자리를 떴던 남성이 다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비틀거리면서 오던 남성은 갑자기 한쪽 콧구멍을 엄지 손가락으로 누르더니 흥하고 코를 풀었다. 오만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소연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저씨 아줌마가 되는 순간은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고, 남 신경 안 쓰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풀어지는 순간이라고 하던데.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민폐가 되든 말든 저렇게 코를 아무렇지 않게 푸는 것처럼 무언가 풀어진 부분은 없는지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 전철을 탈 때 옛날보다는 빈자리를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지긴 했지만, 뭔가 염치와 체면이 구겨진 중년, 그게 자신이 있는 현주소 같아서 씁쓸했다.
이곳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현실적으로 소연이 만날 수 있는 사람 군은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회장을 차지하려 애쓰던 그 여성 회원들처럼 소연도 그렇게 적극적이 되어야 하나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정글은 사회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다시 산악회에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려오는 길. 다리에 힘이 많이 풀려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다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어떤 쪽이 더 힘들까 생각했다. 등산은 인생을 닮았다고 하던데, 소연은 오르막도 힘들고 내리막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은 어차피 힘든 것, 인생도 고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는 닮았다고 인정했다. 여러모로 고단한 하루였다.
차가 출발하기 전, 아직 내려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 소연과 나선은 주차장 앞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때, 소연이 갑자기 “어어~”하며 놀랐다. 그러더니 어중 띤 목소리로 어떤 남성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정호 씨. 이런 데서 뵙네요.”
키는 175센티 정도. 조금 장발에 파마를 한 듯 웨이브가 있고, 등산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다. 나이는 소연과 비슷해 보였지만, 또래 남자보다 젊은 느낌이었다. 정호도 깜짝 놀란 얼굴로 소연에게 “등산 오셨어요?”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선을 보고도 목례를 했다. 옷을 입은 스타일이나 말하는 태도 모두 단정하면서도 소탈해 보여서 나선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소연을 쳐다봤다.
그런 나선의 기대를 무 자르듯 소연이 “가세요~”라며 등 떠밀 듯 인사를 했고, 정호도 “그럼 조심히 내려가세요”하며 인사를 하고 갔다.
“누구야?”
궁금해진 나선이 정호의 뒷모습을 보며 소연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 사람. ”
호기심이 생긴 나선은 “허우대는 괜찮아 보이는데?”하면서 소연을 은근슬쩍 떠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소연은 철벽을 쳤다.
“나랑 잘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유부남이야?”
소연은 순간 생각했다. 그는 돌싱이긴 했지만, 돌싱이라고 하면 나선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펼쳐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소연이 혼자 남았을 때, 사람들은 주변에 싱글 남자만 보이면 무조건 소연과 연결을 하려 들었다. 그 사람이나 소연의 취향이나 의견 따위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싱글이면 아무나 갖다 붙이곤 해서 그걸 완곡히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거절을 하면 돌아오는 말이 “넌 너무 눈이 높다”는 말이었다. “아무나” 만나봐야 한다는 거였다.
누군가를 ‘아무나’라고 표현하는 게 소연은 어쩐지 편치 않았다.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게 ‘아무나’ 취급을 받으면 불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아무나’란 누군가를 낮잡아서 일컫는 말이 아니라 사람 보는 기준을 낮춰서 보라는 뜻이라는 걸 소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예전 같으면 만나지 않았을 법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있다. 소연으로서는 나름의 최선을 다한 거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와서 소연의 나이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48세라고 하니, 빠른이냐 아니냐까지 따져서 한 살이라도 어렸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했다.
“전 오빠라는 말 듣는 게 좋거든요.”
그 말에 소연이 할 말을 잃기도 했다. 차에 타자마자 쿵쾅대는 뽕짝 소리가 오디오에서 나와 깜짝 놀라게 한 남자도 있었다. 잘못된 건 아니나 취향이 너무 달랐다.
어떤 남자는 소개팅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잠깐 산책하는 동안, 방귀를 뀌어대기도 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할머니가 실수했는 줄 알았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방귀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범인은 그 사람이었다. 그냥 뽀오~옹도 아니고 부욱~도 아니고 뿌지직하는 물방귀 소리. 저러다 속옷에 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여러 차례 물방귀 연주가 계속되었다. 방귀 소리마저 귀엽게 들리는 단계가 아닌 이상 매너가 아니라고 여겨졌고,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은 더 도드라졌다. 혼자 오래 살수록 자신의 스타일과 가치관이 강해져서 판단도 빨라진다. 다름과 차이를 상쇄할만큼 매력적이거나 재미있거나 대화가 통하거나 하면 상관없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도 서로 피차간에 내가 이러려고 여기 나왔나..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시간이었으리라.
정호와도 그렇게 연결되는 게 싫었다. 오십 다 되어서까지 싱글이면 아무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나선이 알 리가 없었다.
“왜 아닌데? 유부남이야?”
나선은 집요하게 물었다.
“암튼 아냐. 완전 왕재수야”
이렇게 말해야 나선의 상상력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 같았지만 기어이 나선은 한마디를 보탰다.
“정육점 남자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당에 저 남자가 뭐가 문젠데?”
나선의 말에 소연은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소연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일단은 경제적인 활동을 성실히 하는 건 기본. 그 외에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좋았다. 여유가 있고,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 그리고 성실해서 안심이 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