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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영 Jan 29. 2021

<場글Book>  좋아하니까 닮아가는 거야.

그림책<색이 변하는 아이가 있었다/김영경 글그림>

'마음 쓸 꼰대' 맘이 전하는 마음의 이야기


'생각할 꼰대' 맘이 나누는 책 이야기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를 카테고리로 나눈 다음, 각 카테고리별로 등급을 매긴다면 가장 윗자리에는 '존재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 누군가에게는 그게 가족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연인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 없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  김신회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中-





 푹푹 찌는 어느 여름날,

우편함에는 우편물이 수북이 꽂혀있었다. 날씨 탓일까, 우편물 뭉치를 물고 있는 우편함이 답답해 보였다.

우편물을 쑥 뽑아내 대충 훑어보며 마루에 편지 봉투를 툭 던져 놓으려는 찰나, 낯선 꽃편지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홀리듯 뒤집어본 편지 봉투 수신인 란엔 '소 영 이 에 게'이라고 쓰여있었다.  


'어, 나한테 온 거네. 누구지! 방학 때라 친구가 보낸 편지인가!

전화를 하면 되지. 유난스럽게 편지는 무슨...'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뜯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책상 위에 놓인 책 한편에 편지를 꽂아 놓았다.

물도 한 잔 마시고, 옷도 갈아 입고,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엄마랑 얘기도 좀 하다가 내 방으로 건너왔다.

방에 들어와서 책갈피에 넣어 둔 편지봉투를 꺼내 들었다. 누가 보냈는지 쓰여있는 않은 꽃 편지...

괜한 이 설렘은 무엇!

찢어지지 않게 칼로 조심스레 봉투를 개봉했다. 봉투 사이즈에 맞게 세 번을 접은 두 장의 편지지.

편지지를 펼치니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정성스럽게 눌러쓴 빼곡한 글이 보였다.


'안녕!'


'미쳤나 봐. 안녕이 그렇게 설렐 말이냐고...'


두근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편지는 참 불친절하게도 쓴 사람이 누군지 먼저 밝히지 않았다.

다만 모월 모일 어느 곳에 친구들과 있던 나의 모습에 대해 적혀있었... 그 날 본 나의 모습이... 나의 웃는 얼굴이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는 수줍은 고백과 함께.


'어머, 누구지! 어디서 날 본거야.'


괜히 책상 위 거울을 들여다보며 흘러내리지도 않은 귀밑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 장의 편지 안에는 처음 본 날 어떻게 몰래 내 뒤를 쫓아왔는지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 날의 모험담과 ,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써놓았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만나고 싶다는 데이트 신청까지....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한참 이성에 관심 많을... 연애에 대한 로망이 무르익던...

나의 20대 기억 한 편에 남아있는 사소한 에피소드 중 하나.

지금이야 이런 얘기 들으면 스토킹이니 납치니 하는 범죄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그때는 추억으로, 낭만으로 여겼었다.


요즘 20대들은  만나기 전에 미리 sns를 통해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도 한다던데..


'라때는 말이야.'


좀 많이 아날로그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전화보단 편지가 낭만적이라 여기기도 했었고. 약속도 없이 자주가던 카페 메모판에 쪽지 하나를 남기기도 했었다.

혹시 맘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읽지도 않 학보(대학신문)에 슬며시 마음을 담아 건내기도 했으니까. 


  참 오래전 기억이다.

세월이 그만큼 많이 흐르기도 했고, 변하기도 참 많이 변했다. 물론 더 많은 세월을 사신 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핏덩이가 어른 흉내 낸다고 꾸지람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아참, 그때 그 연애편지를 보낸 주인공 하곤 어떻게 되었냐고...?


어렴풋한 기억으론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튕기려는 마음이었는지, 겁이 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편지 이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대 스쳐간 재밌는  기억들 중 하나일뿐.

지금내가 있기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너무 잠깐이라 기억에도 없는 사람들, 잠시 머물다 잊힌 사람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옷깃만 스친 나의 인연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연도 있었고, 스쳐간 것이 아쉬운 인연도 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스쳐간 인연에 대한 미련과 회환이 많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서로에게 오래 스며들 수 있는 인연이었싶어 아쉬움이 남는 사람들 있다.

그렇게 안타깝게 놓쳐버린 인연도 있지만, 내 곁엔 오래 머물며 깊게 스며든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감사하다. 옷깃만 스친 인연도 내 삶의 한 부분이지만, 깊이 스며든 그 소중한 인연이 온전히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새 닮아 있는 말투, 표정, 관심사...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기도 하고, 나의 모습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어 서로를 물들이는 사이가 된 것이다.


서로의 다른 점, 서로의 닮은 점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때론 설레고, 때론 기쁘고,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하고 싶다.

서로가 가진 색으로 서로를 물들이며 익숙해져 가는 것.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색을 맞추려고 자신의 색을 바꾸기도 한다.


 나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내 말투도, 관심사도, 좋아하는 음식도 달라진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맞춰주려고 애쓰는 편이다. 내가 좋은 것보다 곁에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하고 좋다. 별로 관심 없던 이야기도, 잘 먹지 않던 음식도, 옷차림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게 맞춰가게 된다.

왜?

좋아하니까.




색이 변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처음 색이 변했던 것은
커다란 수족관에서 은빛 물고기를 만났을 때였다.
<색이 변하는 아이가 있었다 中>

  김영경 작가의 그림책 <색이 변하는 아이가 있었다>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은 제목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색이 변하는 아이다.

유치원 친구들과 처음 간 수족관이 얼마나 신기했을까!

바닷속처럼 드넓은 수족관과 그 속에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멋져 보였을까!

아이는 단박에 수족관의 은빛 물고기에 동화된다.

좋아하는 것을 보면 닮고 싶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엄마, 난 공룡이 될."

"엄마, 난 로봇이 될 거야."

"엄마, 난...."

 수시로 좋아하는 것이 바뀔 때마다 되고 싶은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 수족관 속 은빛 물고기로 변한 아이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다양한 색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닮고 싶은 사람을 롤모델 삼아 그 사람을 모방하기도 한다.



  색이 변하는 아이는 자라서 파란 머리색의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하는 모든 것이 좋았고,그래서 소년과 함께 본 숲의 모든 색으로 변해간다. 그때 소년은 색이 변하는 아이에게  작고 동그란 무언가를 건네주는데...


해가 지면서 숲이 물들어 가던 그때
아이는 자신의 색을 보게 되었다.
아이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색을 보게 된 아이는 왜 숲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버렸을까!

다른 사람의 색깔을 닮아간다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일 텐데....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색을 바꾸는 아이의 모습에서 순수함과 함께 당당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고집스레 한 가지 색만 부여잡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지금 나의 모습을 좀 내려놓고 싶데...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게 된 지금.

왜 그렇게 재고 망설이게 된 것일까.


나도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참 편하고 좋았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간다는 것이 익숙함으로...


그 익숙함이 무뎌짐으로 바뀌면서 서서히 상대에게 물들어가던 나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왜 내가 맞춰야 하지! 왜 나만? "


결국 그 무뎌진 마음은 엉뚱한 곳에서 칼날을 세우고 만다.


'오냐오냐 하니까 내가  만만하지?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제일 쉽지? '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괜히 미운 마음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참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쓰거나 스스로를 바닥까지 끌어내려 자책을 하기도 했다. 상대를 끌어내리든 나를 끌어내리든 끝장을 보고 나면 잠시 개운한 마음이 드는 것 같지만, 이런 결말은 늘 뒤가 참 공허하다. 알면서도 자꾸 반복이다.


 내 색깔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다. 누군가를 닮아간다는 것이 나를 잃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맞춰가는 것이 지는 거란 생각이 들수록 내 것을 지키려 더 안간힘을 썼고 점점 더 고집스러운 아줌마가 돼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꽁한 마음을 쏟아내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않은 너의 그런 점이 정말 좋아 보였어.
그래서 너무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었어.
그런데 너에게 나도 그런 사람이니?'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난 너에게 어떤 색깔 물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을까!

그렇게라도 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나 보다.

익숙함, 무뎌짐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은 왜 나만 느낄거라고 생각했는지.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는 관계가 되기 위해 서로에게 더 많이 스며들어야 는데,

그러기도 전에 난 본전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나에게 물든 사람들, 나를 물들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이게 아닌데 말이다. 관계에 있어 저울질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다.


  서로의 마음에 물이 든다는 것은,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봉숭아 물이 다 빠지기 전에 첫눈이 오길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처럼.

순수하게 마냥 좋아하기만 할 수 있었던 때처럼.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것이 밑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때처럼.

닮고 싶은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을 때처럼...


서로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것이 참 쉽않다. 그래서 무척 사람냄새가 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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