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댁에 갔을 때 새 수건이 필요할 일이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종이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보관한 깨끗한 새 수건이 몇 장 있다“고 말씀하시며 수납장에 가시더니 깨끗한 분홍 수건을 하나 꺼내 오셨다.
그 수건에는 “1984. 10. 28. 추계야유회기념”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모서리 하나 닳지 않은, 어디 한 군데 변색된 곳 없는 (40년 된) 깨끗한 새 수건이었다. 무슨 추계야유회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식 중 하나가 어디 다녀와서 준 거겠지, 라고 하셨다. 기상청 날씨누리 과거관측 데이터에 따르면 1984년 10월 28일, 서울의 날씨는 다음과 같았다.
평균기온:7.8
최고기온:11.1
최저기온:4.9
평균운량:4.3
일강수량: -
아마도 구름 낀 쌀쌀한 가을날이었나보다. 그 날 가족 중 한 명은 젊은 날 어딘가의 교외로 나가서 야유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막걸리도 한 잔 마시고 노래도 한두 곡 부르고, ‘타파웨어’ 같은 데 차곡차곡 담긴 김밥도 먹었을지 모른다. 그 날의 할머니는 활기찬 40대 여인이었고, 이 수건을 받아서 상자째 수납장에 잘 넣어 두셨다. 그리고 온갖 일들이 일어났고, 4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너무나 중요했던 수많은 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으며, 세계의 빈 자리는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 태어난 주민들로 채워졌다.
“수건은 새 것 그대로인데 나는 이렇게 쭈그렁 노인이 되었네, 이걸 나중에 쓰겠다고 처박아 놨네, 영원히 살 것처럼.” 하고 할머니는 웃으며 읊조리듯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억조차 희미한 수많은 하루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고, 오늘 또 하나의 그런 하루를 살고 있다. 나도 어쩌면 -운이 좋다면- 2064년의 어떤 봄날 하루쯤은, 1984년에서 온 이 분홍색 수건과 2024년에서 온 이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