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05. 청학동으로 유배당한 사냥꾼

[2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중생활 (환경 편)

by 신지용


1. 다이어트 캠프가 된 예절 학교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아이'였다. 어머니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나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놀란 마음에 나를 찾아 헤매다 보면, 나는 어김없이 구석진 가게 앞에서 처음 보는 물건들을 홀린 듯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내 손끝으로 세상의 모든 감촉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촉각 방어'와 '호기심'의 혼종이었다. (가끔은 그 호기심으로 위험한 곳에 기어 올라가기도 했고.)


결국 부모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산만함의 성지, 예절 교육의 끝판왕. 나를 지리산 청학동 예절학교로 보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사고를 쳐서, 소위 말하는 '문제아'라서 간 줄 안다. 하지만 내 유배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식탐 조절'이였다.


나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듯 엄청난 식탐을 부렸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먹는 행위가 주는 즉각적인 도파민을 본능적으로 탐닉했던 것 같다.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저장하려는 그 본능을 엄마는 걱정했다.


청학동에 가면 고기는커녕 풀떼기(나물) 위주로 밥을 준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의 큰 그림이었다. 덤으로 얌전한 예절까지 배워오라니, 어머니에겐 일석이조의 완벽한 캠프였을 것이다.


청학동은 소문대로 나물, 감자, 옥수수 같은 자연식만 주는 곳이었다. 처음엔 고기 반찬이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놀랍게도 그 '강제적 도파민 차단'은 효과가 있었다. 자극적인 음식이 끊기자 미친 듯이 날뛰던 식탐이 차분해졌고, 야채는 입에도 안 대던 내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 음식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2. 눈의 꽃과 빨간 MP3 : 도파민 벙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착해 보니 그곳엔 진짜 '무서운 언니, 오빠'들이 가득했다. 염색한 머리를 억지로 검게 칠하고 끌려온 듯한 포스, 눈빛부터 다른 그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잔뜩 쫄아버린 통통한 초등학생일 뿐이었다.


'나는 살 빼러 왔는데...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밤이 되자 서러움이 밀려왔다. 낯선 천장, 딱딱한 바닥, 그리고 무서운 룸메이트들.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엄마 몰래 패딩 속에 숨겨온 '빨간색 아이리버 MP3' 뿐이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았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박효신의 <눈의 꽃>. 당시 최고 인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OST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 애절한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에 빙의해 눈물을 또르르 흘리다 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배가 고파서 운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내 유일한 정서적 도피처였다.)



3. 노란색 악몽과 뇌의 셧다운


다음 날부터는 '노란색 악몽'이 시작되었다. 훈장님은 "하늘 천~ 따 지~"를 외쳤고,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천장에 매달린 낡은 형광등이 문제였다. 그 묘하게 누렇고 깜빡거리는 불빛.


지루한 한자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올 때쯤, 내 눈에는 세상이 온통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훈장님의 얼굴도, 친구들의 한복도, 내 손등도 전부 누렇게 보이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것은 ADHD의 뇌가 극도의 지루함을 느낄 때 발생하는 '저각성(Underarousal)' 현상이었다. 뇌가 자극을 받지 못해 스스로 전원을 꺼버리는 것이다.


'안 돼, 자면 안 돼. 저 무서운 언니들도 다 보고 있고... 무엇보다 훈장님한테 걸리면 끝장이야.'


나는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혼자만의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손가락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강제로 집어 올려도 보고,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보이지 않는 적과 눈싸움도 해봤다. 그래도 안 되자 급기야 '메소드 연기'를 시도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자는 게 아니다. 훈장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경청하는 중이다'라고 필사적으로 최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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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수록 노란색 소용돌이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 내 뇌는 나의 이 가상한 발악을 비웃듯 가차 없이 셧다운 버튼을 눌렀다. 저항할 수 없는 중력에 고개를 떨구며 꾸벅꾸벅 졸았고, 엔딩은 뻔했다.


"거기, 너! 앞으로 나와!"



4. 깜지 형벌 : 도돌이표 지옥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몽롱한 정신으로 불려 나갔다. 나는 종아리를 걷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훈장님의 벌은 예상과 달랐다.


"너는 남아서 천자문을 다 외우고 쓰거라."


쓰고, 또 쓰고, 입으로 중얼거리고. 그것은 회초리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었다.

ADHD에게 '단순 반복'은 고문이다. 텅 서당에 홀로 남아, 그 의미도 모를 글자들을 백지에 채워 넣는 시간. 지루함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한 대 맞고 끝내는 게 낫지, 이 끝없는 도돌이표는 내 영혼을 갉아먹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때의 그 지옥 같은 지루함이 뇌에 얼마나 깊게 박혔는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글자들만큼은 줄줄 꿴다는 사실이다.


청학동은 나에게 '예절'을 가르치는 데는 실패했지만, '지루함이라는 공포'를 이용해 '한자 암기'를 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청학동은 나에게 한자는 못 가르쳤지만(강제로 외워진 것 빼고), '욕구를 조절하는 법'과 '건강한 미각'은 확실히 심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식단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눈의 꽃>을 들으며 흘린 눈물은, 훗날 감수성 풍부한 작곡가가 될 떡잎을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라고, 이 지옥 같은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해 본다.



� 뇌과학 토막 상식: 왜 ADHD는 지루하면 졸까?

ADHD의 뇌는 기본적으로 각성 수준이 낮은 '저각성(Underarousal)'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도파민이 나와 뇌가 깨어나지만, 지루하고 반복적인 상황(훈장님의 한자 소리)에서는 뇌파가 수면 상태에 가까운 '세타파'로 급격히 떨어집니다.

즉, 의지가 약해서 자는 게 아니라 뇌가 '자극 결핍'을 견디다 못해 시동을 꺼버리는 생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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