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는 음악을 곁들이는 걸 좋아한다.평소에는 주로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을 틀어놓지만 지금은 연휴의 마지막을 더 즐기고 싶어 신난 노래를 틀었다. 날이 추워 책상이 아닌 침대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전기장판 덕에 엉덩이는 뜨끈한데 맥북이 차가워 손이 시리다. 이불 속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니 대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노트북에 워드나 한컴을 켜놓고 붙들고 날 새던 시절이 많았다. 그때 쓰던 노트북은 발열이 심해서 손이 따뜻하다 못해 지문이 사라질 걱정이 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쓴 글들은 뚝 꺼진 노트북 안에 고이 잠들어 있다. ‘언젠간 데이터만 복구해야지- ’ 막연하게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1월 중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토요일 아침부터 난리를 쳤다. 연휴 기간에 넉넉하게 집 정리를 하면 되었겠지만 템플 스테이를 가기로 해서 하루 날 잡고 방 정리를 해야 했다. 옷 정리는 그냥저냥 금방 끝났지만 진짜 문제는 물건들이었다. “옷은 낡으면 버리면 되는데 물건은 추억이 있어서 정리하기 오래 걸릴 거야.” 엄마의 말을 명심하며 추억에 잠기지 않고 후딱 치우자 마음 먹었다.
예전처럼 깊은 상념에 잠기지 않고 속도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추억에 잠길 만한 것보다 쓰지 않고 방치된 쓰레기가 많았다. 사용기간을 한참 넘긴 립스틱과 같은 화장품들이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썼던 서랍장을 여니 왜 모았는지 모를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판타지에 잔뜩 빠진 초등학생이 주워 온 것들이 아직도 있었다. 모두 쓰레기통으로 직행. 언니가 틀어놓은 외국 노래를 들으면서 서둘렀다. 아차차. 오래된 지갑을 열자 코팅된 종이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여행가서 모아온 영수증들이었다. 영수증을 버리지 않고 지갑에 간직했던 그 당시에는 타지에서 넘어온 이 종이가 참 의미 있었다. 현금을 찾을 때마다 몇 번을 이 영수증을 봤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버리지 않고 아직까지 둔 이유는 어떤 식당에서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기록되어 있는 점이 좋아서였다. 정리는 나중에 하겠지라며 미뤄두던 일수가 길어져 영수증은 잉크가 다 날아가 번지르르한 종이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죄다 구겨 검은 봉지에 넣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 일찍부터 버릴 걸, 생각해보니까 카드 내역을 검색해보면 되겠구나 싶어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저린 다리를 펴고 일어나 보니 집안 전체에 재활용 쓰레기, 일반 쓰레기들이 발에 채이도록 많았다. 인간은 쓰레기를 너무 많이 만드는 거 같애. 디지털 승.
사실 제일 두려웠던 구역이 책상과 바로 앞에 있는 책장이었다. 일단 제일 비싼 맥북을 가방 안에 모셔 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이제는 읽지 않는 전공 책들을 바닥에 쌓아 놓고 나니 자리가 생겨 요즘 읽는 책들을 꽂아 넣었다. 맨 아래와 그 위에 줄은 몇 년간 꺼내보지도 않은 만화책이지만 애초에 버릴 생각이 없어서 다른 칸부터 치우기로 마음 먹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의 <명탐정 코난>은 아무도 안 사갈 것 같은데 남 주기는 아깝다.
다이어리와 공책이 무척 많았다. 대학 다니면서 빽빽하게 칸을 채운 다이어리는 여전히 버릴 수가 없어서 책장 맨 위에 올려다 놨다. 반면에 공책은 가차없이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전부 재활용할 항목으로 분류될 애들이라 바닥에 던져 내려놓았다. 내가 산 공책말고도 남들이 쓰다만 공책도 있어 바닥에 쌓여가던 것들이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고등학교 앞에서 나눠주던 입시학원 홍보용 이면지 공책도 있었다. 야자실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단편 소설을 갈겨 놓은 글씨가 귀여웠다. 보라색 펜으로 그린 만화도 있었다. 이중인격인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첫 만남을 그렸는데 분량도 꽤 있고 대사며 작게 적인 문구들이 재치 있었다. 사진을 찍어두고 과거의 나를 사랑스럽게 느끼기까지만 하고 이 공책도 마찬가지로 버렸다. 어차피 버려질 애였지만 ‘내가 정말 예전부터 글을 좋아했구나-, 이야기를 좋아했구나-’ 를 떠올리게 해줘서 고마웠다. 빼곡하게 적힌 공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어떤 작은 깨달음과 고민들, 쓰다만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창작물들. 나란 사람을 잘 보여주는 산물이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적고 눈에 보이는 곳에 붙여주면 그날 하루와 다음날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아날로그, 디지털 무승부.
코난과 다이어리 말고도 버릴 수 없는 것은 촬영대본과 스토리보드였다. 현장에서 들고 다니면서 꼬질해진 종이는 추억회상을 마치고 깔끔하게 버릴 수가 없었다. 간단히 정리만 하고 다시 파일에 넣어두었다. 의외로 연극할 때 무수히 봤던 대본은 사진 한 방만 남기고 바로 버렸다. 대본이 내 글이 아니라서 그런가. 또한 연기 경험은 종이로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터운 파일철을 여니 대학 과제였던 소논문 여러 장이 담겨있었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한 문단, 한 문장씩 펜이 그어져있었다. 설화 관련 과제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났다. 예전 노트북에 있겠거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이어리 꾸미거나 콜라주한다고 색감이 쨍한 종이를 찢어 모아둔 파일철이 있었다. 쓸만한 것들만 모아 다시 꽂아두는데 그 옆에는 조금 생소한 파일철이 보였다. 안을 펼치자 대학내일 잡지 낱장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바로 바닥에 내려놓기에는 담긴 글들이 반갑고 여전히 좋았다. 괜히 아쉬워 그 자리에 서서 한 장, 한 장 들춰가며 읽었다. 읽고 버리기 전에 마음에 드는 글이나 나중에 볼 도움되는 내용을 찢어서 모아두었는데 그 양이 제법 되었다. 모은 글들은 대학생이 투고한 칼럼들이었다. 한 번쯤은 나도 이곳에 글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대학내일 잡지가 더 이상 발행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었다. 월요일마다 발행되는 잡지를 챙겨놨다가 공강시간마다 만지작거리며 아껴 읽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으면 다시 앞으로 넘겨 마음에 드는 글을 읽고 그랬다. 글 너머의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응원하며 공감대를 나누느라 정신없이 행복했던 기억들이 남아있다. 디지털 매거진으로 발행된다고는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아날로그가 조금 승.
새벽 5시쯤에 번쩍 눈이 떠져 급히 씻고 지하철을 탔다. 긴 개찰구 통로를 걷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럽지만 정돈된 방안을 떠나지 못했다. 어제의 영수증을 비롯한 떠나보낸 종이 쓰레기들을 떠올리며 안드로이드와 디지털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낙산으로 향하는 불 꺼진 버스 안에서 친구를 비롯한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 속에서 나 혼자 말똥 말똥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핸드폰 밝기를 최소로 하고 삼성노트를 켰다.
“ 엄지로 쓰는 글들.
펜을 잡으면 자유롭지만 정리가 잘 안된다. 그리고 한 켠에 남겨두게 되는 글들이 된다. 아날로그보다 디지털이 좋은 점. 수정과 저장이 용이하다. 이사준비를 하면서 내 방을 싹 치웠다.나 진짜 많은 글을 썼구나 시도때도 없이 생각을 남겼다 작은 조각이라도 창작을 했다. 전보다 얼마나 성장했나하면 잘 모르겠다. 오래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건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딱히.. 아웃풋에 비해 인풋이 부족하구나!! 자기 계발 관련 책만 읽어서 그런 것 같다. 사유하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다양하게 책을 읽어보자. 템플스테이, 가면서 음악을 듣기 위해 폰을 켰다. 노래를 들으면서 손가락으로 일기를 쓴다.
사실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마모된다. 그냥 용량을 차지하는 데이터 쪼가리가 될 뿐이다. 정리해야지. 자주 들여다봐야지. -2023.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