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어디까지 해봤니?
24시간 중 2~3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고, 9시간을 회사에 팔고, 가끔 몇 시간을 더 팔아가며 십수 년을 살았다. 복잡한 이유의 탈을 쓴 단순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1n년 사이사이에 셀프 안식년을 가졌다. 백수생활의 역사가 깊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4번째 백수생활 중인데 이게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 4번째니까 4세대 백수? 요즘 4세대 아이돌들이 돌풍이라 그런가 어감이 매우 맘에 든다. 자랑스럽지도 숨기고 싶지도 않은 백수의 역사를 살펴보자.
1세대 백수(초보 백수) : 졸업 전 작은 사무실에 취직을 했지만 전 직원 다섯 명이 일하는 환경이 너무 답답해서 수습기간만 마치고 소속 없이 졸업을 했다. 이력서를 계속 쓰긴 했지만 취업 준비생이라기엔 딱히 준비를 하는 게 없었으니 그것이 백수생활의 시작이었다. 뭐든지 처음은 어렵고, 두렵다. 무용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주 울적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유 없이 비싸게 산 정장을 입고 가끔씩 면접을 보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시간은 많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백수생활을 전혀 즐기지 못하다가 취직에 성공하며 3개월의 짧은 백수생활을 마쳤다. 프로백수인 지금 초보백수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 짠하다.
2세대 백수(명랑 백수) : 첫 번째 백수생활을 끝내준 회사를 18개월 만에 박차고 나오며 2세대 백수를 맞이하게 된다. 18개월, 지금은 왜 울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최선을 다해 울었고, 덕분인지 그 회사를 벗어나자마자 모든 것이 즐겁고, 빛났다. 2세대 백수이자 명랑백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계획도 생각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백수생활을 즐겼다. 집 근처 시장에서 장을 보고, 밥을 지어먹고,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고, 해맑기 바빴다. 하지만 재벌집 막내아들이 아니었던지라 통장잔고 바닥이 "나 여기 있어"하고 얼굴을 내밀면서 2세대 백수생활을 마무리한다.
3세대 백수(파리 백수) : '화양연화'라는 말에 꼭 맞는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장 사치스러운 백수생활을 즐겼다. 이 때는 어느 타임라인을 눌러도 행복에 겨운 내가 그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퇴사여행을 계획하다가 점점 기간이 늘어나고 워킹홀리데이로 급선회했다. 네버엔딩 파리앓이라는 약도 없는 병에 걸려있었고, '이때가 아니면!'싶기도, 여차하면 파리에 눌러살고 싶기도 했다. 가야 할 이유는 너무 많고,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렇게 파리로 향했다. 공부도 일도 전혀 하지 않으며 워킹 없는 워킹홀리데이를 즐겼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호인과 현인을 오가며 우아한 백수생활을 즐기다가 연락이 뜸하던 통장잔고 바닥이 "나 여기 있어"하고 손을 흔들면서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나의 호인, 현인 코스프레는 경제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다.
4세대 백수(프로 백수) : 백수가 되려고 퇴사한 것은 아니었다. 주식으로, 코인으로, 부동산으로, 팬데믹의 복판에서 파이어족들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들이 쏟아졌고, 나도 될 수 있어 보였다. 적은 돈이었어도 주식이 계속 오르니까 희망에 찼다. 하지만 묻지 마 투자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고, 희망의 불꽃은 작아지다 못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상실감을 느낄 틈 없이 막연하게 큰 부자가 되고 싶어 지던 찰나, 좋은 사업아이템을 함께 해보지 않겠냐며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당장에 회사를 그만두고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도 동업도 노예로만 살던 나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언제 가슴이 벅찼느냐는 듯이 동업프로젝트는 일장춘몽으로 끝이 났고, 뭘 해야 할지 몰라 둥둥 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프로백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전업백수라고 해야 하나. 현재 16개월째 백수이며 적당한 여유, 적당한 불안을 적당히 즐기며 통장잔고 바닥이 또 한 번 손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전에 명랑백수 탈출기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류승수 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대표작이나 작중 명대사는 당장 떠오르지 않아도 라디오스타에서의 이 문장만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언젠가는 이 문장을 이룬 백수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