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00일 no.6
제주에서 별 보기를 좋아했다. 제주의 별에 관해서라면, 사진처럼 콕 박힌 장면 세 개가 있다.
김녕
게스트하우스에 온 지 4일쯤 되었을 때였다. 마감하고 슬슬 잘 준비를 해볼까 하는데
“별 보러 가자!”
흰색, 검은색, 저마다 롱 패딩을 하나씩 걸친 스텝들이 호다닥 사장님 밴에 올라타고 있었다. 밤 11시였다. 갑자기 별을 보러 떠났다. 어두워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차 안에는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도 한 캔씩 샀다. 어딜 가려나 했더니 김녕 풍차 발전소였다. 10-15분쯤 달려 도착했다. 드르륵 차 문을 열자 밖은 까맣고 차가웠다. 최근 디뮤지엄에서 쥘리에트 비네의 그림을 보며 어쩜 저리 시리도록 새카만지 한참을 뚫어져라 봤었는데, 딱 그렇게 까맸다.
사실 기분이 별로인 날이었다. 경험 삼아 파티에 참석했는데 웬 이상한 아저씨 앞에 앉아 내내 불편한 시간을 보낸 후였다. 앞으로 이상한 사람 많이 만나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내가 게스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된 계기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차갑고 적막한 어둠은 그 기억을 말끔히 씻어줬다.
별 세상이었다. 1억 개의 별이 쏟아졌다. 무서운 이야기도 하고, 서로의 이름을 크게 외쳐보기도 하고, 별자리를 알려준다는 앱을 다운로드하여 보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어둠 속이라 그런지 괜히 스텝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었는데, 왁! 놀라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놀라 팔뚝을 마구 때리기도 하고 평소보다 더 크게 웃기도 했다.
이 날부터 별을 짝사랑하게 된 것 같다. 밤만 되면 꼭 하늘을 봤다. 제주 살이 4일 째였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꿈인가 싶다.
행원
제주 시골 마을은 밤에 불이 없다. 웬만하면 별이 잘 보이는 편이다. 특히 행원리가 그렇다.
우리 스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지만, 같이 스탭을 하던 친구가 그만두고 행원리로 이사를 가서 몇 번 놀러 갔었다. 덕분에 행원리의 밤하늘을 자주 봤다. 행원리는 내가 다녀 본 중 가장 한적하고 조용한 골목을 가졌다. 흙바닥을 걷는 제 발소리에 흠칫 놀랄 정도다. 미국 남부 옥수수밭 한가운데의 공기와 비슷한 듯도 하고,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빈 집도 많아서 밤마다 고양이들의 하악질 소리가 메아리친다. 자연의 소리 말고는 모든 게 멈춘 듯한 마을에서 고개를 들면 검푸른 하늘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 새벽 2시쯤 밖으로 나왔는데, 드림웍스 오프닝처럼 깊은 푸른색 하늘에 별이 콕콕 박혀 있었다. 사실 거창하게 뭘 한 것보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나만의 제주를 만들어준다. 제주에서 좀처럼 밤잠이 안 온다면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나와서 친구와 이름 모를 마을 골목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군산오름
그렇지만 역시 베스트는 깜깜한 밤, 오름 위에서 보는 별이라고 하겠다. 친구와 여행 중 차를 빌려 한 밤중에 오름에 올라간 적이 있다. 막연히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깜깜하니 잘 보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지도에 '오름'을 치고 대충 봐서 올라가기 편한 곳을 골랐다. 군산오름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다.
깜깜한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좁은 산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니 옛날에 본 영화 '스파이더위크 가의 비밀'처럼 비밀 장소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탁 트인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적당한 장소에 주차했다. 아무도 없으니 창문을 열고 차 오디오로 재즈 음악을 크게 틀었다. (한여름이었으면 아마 분위기에 잔뜩 취해 차 보닛이나 지붕에 올라앉았을 거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면 별이 총총 박혀있는 까만 하늘. 눈을 조금 내리면 반짝이는 야경. 재즈 선율은 아름답고. 공기는 적당히 차갑고. 음악 소리를 줄이면 진공 상태처럼 조용한 산속. 혹시 누가 영화를 찍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말 흔한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그만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차 배터리가 방전돼서 꼼짝 못 하고 서비스 센터를 기다리는 사건이 생겼다.)
별은 기회가 될 때마다 봐야 한다. 제주의 별을 잊지 못해 또 보러 갈 예정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