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00일 no. 7
살면서 육체를 힘들게 써 본 적이 거의 없다. 모험심이 많아서 새로운 곳에 가면 빨빨 돌아다니긴 했지만 내 마음대로 쉬엄쉬엄 가니까 '노동'까지는 아니었고... 운동도 잘 못했고, 아르바이트도 과외밖에 안 해 봤고, 집안일도 잘 몰랐다. 교환학생 가서 처음으로 혼자 세탁기를 돌려봤다. 살면서 내가 할 줄 아는 건 앉아서 공부하고 시험 치는 것 밖에 없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쉬는 날 뿐 아니라 일하는 날도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특히 아침 청소의 시작은 도미토리 창문을 여는 일인데, 햇살 좋은 날 내 키만 한 창문을 확 열어 빛이 쫙! 들어오면 상기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설레는 봄노래를 크게 틀어주면 텐션 두 배~
음식물 쓰레기를 그냥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고. 벌레를 보고 기겁하지 않게 되고. 화장실 바닥을 슥삭 닦고 이불을 착착 접는 것도 재밌었다. 나중에는 나름 순서와 규칙도 정했다. 퀘스트 깨는 게임 같았다. 요즘도 막연하고 힘들 때 육체노동만큼 위로가 되는 게 없다. 노동은 끝이 있으니까. 그리고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니까.
제일 좋았던 건 오후 일과인 빨래 개기다. 빨래 개는 기쁨의 팔 할은 따끈따끈한 감촉이다. 갓 구운 빵을 좋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피부 닿는 면적마다 훈기가 퍼진다. 손을 떼도 머물러 있는 온기는 잠시나마 잡념을 날려준다. 섬유 유연제 말고 방금 건조한 빨래에서 나는 빳빳한 향이 좋다. 그 서걱거리는 천 조각을 각 잡고 챡! 갤 때의 희열이란.
주로 로비(왼쪽 사진)에서 창문 너머 풍경(오른쪽 사진)을 바라보며 짝꿍과 함께 빨래를 개는데, 이때 프롬 노래를 들으면 정말 꿈만 같다. 특히 <낮달>은 내 최애 노래. 그 평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지! 언젠가 이 제주도에서 따뜻한 집 짓고 햇살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절로 생긴다.
아침에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일도 은근 마음의 묵힌 때를 청소해준다. 이 때는 작업복과 마스크, 비닐장갑이 필수다. 일단 남녀 도미토리, 화장실, 야외 화장실, 로비 등 게스트하우스 내 쓰레기통을 전부 수거해 온다. 아직 분류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마구 뒤엉켜 있다. 즐거웠던 술자리의 흔적, 게스트들이 밤새 침대 옆에서 까먹은 간식, 클렌징 폼 샘플, 면봉 등등.
뒷마당 쪽으로 가면 '종이, 플라스틱, 캔, 비닐'이라고 적힌 4개의 커다란 노란색 플라스틱 박스와 유리를 넣는 1개의 작은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가 있다. 그 앞에 서서 어지러운 쓰레기들을 꺼내 하나씩 분류 통에 담는다. 탕, 탕, 삭, 탁! 하는 불규칙적인 소리와 음악소리가 어우러진다. 우리는 각자 청소하면서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기 때문에 청소 구역마다 음악이 다르다. 가끔 마주치는 동료와 눈인사를 한다. 손이 더러워서 어깨를 툭툭 칠 순 없으니까. 그렇게 분류를 마치면 커다란 통들을 수레에 싣고 길 가에 있는 분리수거 구역으로 가서 쏟아낸다. 돌아와서 호스로 쓰레기통에 세게 물줄기를 솨- 뿌려주고 엎어놓으면 끝. 이때쯤이면 11시 반 정도다.
아침 10시부터 11시 반 정도까지 도미토리 청소와 분리수거를 끝내면 자유시간이다. 비 오는 날 축 늘어진 기분을 달래려 설렁설렁하면 12시쯤 끝날 때도 있고, 얼른 나가서 놀려고 호다닥 하면 11시에 끝나기도 한다. 대충 스케줄을 적어보자면,
8:20-9:10 조식 준비 및 정리 (그 날 같이 일하는 일반 스텝과 조율해서 한 명은 조식, 한 명은 2차 마감을 맡는다)
10:00-11:30 도미토리 청소, 분리수거
3:30-4:00 빨래 개기
4:00- 체크인 (로비에 앉아 스텝들과 노닥거리다가 체크인하는 손님이 오면 방까지 안내해준다)
및 바베큐 파티 준비 (5:45에는 뭐하고, 5:55에는 뭐하고 등등 자잘한 업무가 있다)
7:30-9:15 1차 바베큐 파티 (게스트와 함께 파티하지는 않고, 8시부터 스텝 저녁식사. 식사 외 시간에는 그냥 로비에 둘러앉아 노닥거린다.)
9:30- 10:50 2차 포틀럭 파티 (이 날 조식 담당이었다면 이미 업무 끝. 들어가서 쉰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날을 제외하곤 거의 남아서 스텝들과 논다.)
2일 일하고 2일 쉬는 루틴으로 대~강 이렇다. 지금은 또 조금씩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일하는 날에도 의외로 쉬는 시간이 많아서 멀리 나가진 못해도 바다 보거나 마을 산책하며 제주를 느낄 수 있다. 단 일반 스텝에 한한 시간표이고 카운터 스텝은 또 다르다.
굳이 쉬는 시간에 나가지 않아도 로비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다.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노동을 반복하며 단순하게 살았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 자체에 몰입했다. 매번 위태롭게 여러 가지 일을 빠르게 처리하던 도시에서의 삶과는 확실히 달랐다. 조급함을 참고 한 번에 하나씩 정확하게 처리하는 습관이 들었다.
매일 같은 노동. 아침에 일어나 청소하고, 빨래하고, 체크인 준비하고, 바베큐 하고, 설거지하고, 정리하기. 계속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귀농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작은 것에 집중할 수 있고... 무언가 퓨어하게 사는 느낌이었다. 디지털 다이어트를 하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방향이겠지. 복잡하고 머리 아픈 것을 뭉텅 덜어 낸 삶.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