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00일 no.8
앞으로 쓸 글의 편의를 위해 스텝들 이름이라도 밝혀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프라이버시를 위해 진짜 이름을 쓰지는 않고 별칭과 그림으로 대체 할 생각이다.
처음 제주도에 발을 들일 때 사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어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손님을 성폭행했다는 기사도 읽었고, 어찌 되었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사장님과 주고받은 문자 하나만 달랑 믿고 가는 거였으니까.
아, 아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언니가 제주 시내에 살고 있었다. 제주살이를 하러 간다니까 언니 번호를 주면서 무슨 일 있으면 주저 말고 꼭 연락하라고 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내게 던져진 구명보트 마냥 그 번호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나 인복이 제대로 발동한 건지, 그냥 제주가 그런 곳인 건지,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100일을 지내면서 떠나보내고 새로 맞이한 스텝들은 10명이 넘는다.
순서대로 적어 보자면-
알프레드.
왕긍정 왕행복 극 하이텐션.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나탈리.
천진난만 아이처럼 해맑은 친구.
이튼.
담백한데 따뜻하고, 진지한데 장난스럽다.
해리.
막 나가는 게 웃기다. 같이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에이미.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처음 사귄 친구라 떠날 때 제일 슬펐다.
키.
술과 맛집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 귀여운 구석이 있는 큰 형님
헤일리.
조잘조잘 사랑스러움 한가득한 언니.
민디.
차분함 속에서 반짝이는 눈빛이 매력적인 언니.
아이린.
세련된 도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옆집 언니 같은 편안함~
우디.
통통 튀어 오를 것 같은 매력의 소유자
케이틀린.
웃음도 많고 말도 많은 귀요미
진부한 말이겠지만,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거다 (나머지 하나는 낯선 곳의 주민이 되는 것). 내 경우엔 게스트보다는 스텝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다음은 제주에서 쓴 일기의 일부다.
여러 인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각자의 고유한 매력과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지금 이 곳에서 누리는 행복 중 하나다. 지도로만 알던 지역을 '내 집'이라 부르며 살아온 사람들, 그들이 진짜 존재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존재의 소중함 같은 것도 생각나고. 마치 머리로만 알던 것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
먹는 것, 이를테면 말간 콩나물국을 좋아하는지 딱새우와 여러 해물이 들어간 진득한 된장국을 좋아하는지, 혹은 입을 것, 말하자면 묵주팔찌를 차는지 엄지손가락 반토막 정도의 은색 링 귀고리를 하는지. 취향 하나하나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아기 때부터 성장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누구는 이렇게 되고 누구는 저렇게 되고. 운명의 아찔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즐겁다.
내가 모르던 섬에, 어쩌면 한 끗 차이로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곳에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법도 배워본다. 인연이라면 만나게 되어있을지니. 떼쓰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