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00일 no.9
정말 많은 여행지를 다녔지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곳은 몇 없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여행 경비가 자꾸 떠올라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 무언가를 봐야 한다, 는 강박에 쫓겼던 것 같다. 남들이 가는 곳 다 가려면 시간이 없었다. 100일간의 제주살이 후, 앞으로는 욕심 버리고 진득하게 한 도시에만 있기로 결심했다. 특히 낯선 도시에서 나만의 단골가게를 만드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가게가 있는 바다 쪽으로 내려가려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오른쪽 길은 비교적 넓어서 차들이 좀 다니지만 확 트여 있다. 날씨 좋은 날은 바다가 하늘까지 올라와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왼쪽 길은 제주 돌담을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늑한 맛이 좋아서 왼쪽 길을 더 선호했다. 연탄이를 데리고 산책할 때도 주로 왼쪽 길로 다녔다. 제주에 도착한 지 3일쯤 됐을 때였나, 왼쪽 길에서 처음 만난 카페는 ‘너는 파라다이스, 길리’였다.
새로운 스텝이 오면 습관처럼 데려가는 곳이었다. 이름부터 뭔가 로맨틱하다.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길리 섬에게 '너는 파라다이스'라고 고백하는 거라고. 혹은 길리가 나에게 '너는 파라다이스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알프레드가 가게 사장님과 안면을 트고 친해져서 우리 스텝들이 가면 음료를 할인해줬다. 우리는 돈이 궁핍하기도 했지만, 백사장과 조개를 비롯해 어딘가 해변스러운 인테리어가 시원해서 좋아했다. 카페 사장님께 '스텝이시죠?'라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네, 저 제주 살아요!
비 오는 날은 ‘책다방’이 제격이다. 해일리가 처음 온 날 혼자 책다방에 있다길래 쪼르르 가서 함께 책을 읽었다. 아직 안면만 튼 정도였지만 그냥 새로 왔다는 언니와 친해지고 싶었다. 책다방은 방석에 앉아 책을 읽는 좌식 카페인데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다가 나중엔 거의 눕다시피ㅋㅋㅋ 했다. 하얀 고양이가 이 곳의 트레이드마크다. 밖에 있는 화장실 가려고 문 열 때마다 냙! 하면서 빛의 속도로 튀어나가려고 해서 주인아주머니가 아주 땀 빼셨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뭔가 내 알아서 살 건데요? 하는 류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날이 흐려서 아침부터 쓸쓸했는데 책다방 분위기가 좀 마음을 달래줬다.
맞은편엔 아주 작은 빈티지 샵 ‘언니네 옷장’이 있다. 사람 다섯 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 여러 가지 옷과 모자, 액세서리 등을 늘어놓고 판다. 인테리어가 어둑어둑하고 구조도 희한해서 마법 상점 같은 느낌이 든다. 구경하다가 해일리랑 귀마개를 하나씩 샀다. 해일리는 검정을 골랐고 나는 갈색을 할까 핑크를 할까 하다가 어차피 잘 안 쓸 거 그냥 파격적으로 가자! 해서 핑크를 골랐다. 그리고 정말 딱 두 번 썼다. 기념품이란.. 그런 거지..
작은 마을에 무려 마카롱 전문점 ‘니나롱’도 있다. 원조 단골은 나탈리였다. 거의 매일 들렀다고 한다. 나탈리가 육지로 떠날 때 사장님께서 직접 게스트하우스로 오셔서 꼬끄를 서른 봉지는 주고 가셨다. 그 후로 우리 스텝들도 마카롱의 매력에 빠져 점심 먹고 니나롱 들렀다 오는 게 습관이 되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워낙 마음씨도 좋고 친화력도 좋으셔서 우리 모두와 금방 친해졌다. 기억력도 좋으셔서 한참 있다가 찾아가도 다 이름을 기억해주셨다. 매번 갈 때마다 덤까지 푸짐하게 얹어주신 덕에 로비와 냉장고에 마카롱이 가득했다. 스텝들마다 좋아하는 마카롱 종류가 달랐는데, 역시 최고는 딸기. 딸기만 다섯 개씩 살 때도 있었다. 가끔 새로 내놓은 마카롱 맛 테스트를 부탁하기도 하셨다. 내게는 월정리의 마스코트 같은 곳인데, 얼마 전에 너무 아쉽게도 영업을 종료하셨다.
‘모래비’는 아침 6시 반에 상쾌하게 오름 투어를 마치고 내려와 늘 들렀다. 땅콩크림 아인슈페너와 초코빵을 먹으면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 적은 별관 2층에 전세 낸 듯 누워서 수다 떨기도 하고, 바다 바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물 색이 어찌나 한결같이 투명한지 감탄하기도 했다. 적다 보니 스텝 친구들과 나눴던 하나둘 대화가 떠오른다. 기억력 되게 나쁜 편인데, 그 시간을 온몸으로 흡수해버렸나 보다.
스텝들이 단체로 뭘 먹으러 나간다 싶으면 십중팔구 '멘도롱돈까스'였다. 또 열에 아홉은 '눈꽃 치즈돈가스에 매운 소스 추가요!'를 외쳤다. 진짜 웃긴 건 음식이 나오면 다들 소스 뿌리는 의식(?)을 찍겠다고 난리가 난다. 그리곤 꼭 누가 제일 예쁘게 소스를 뿌렸는지를 평가했다. 게스트 분들이 맛집을 물어보면 항상 '멘도롱..!'이라는 말이 목까지 나왔는데, 제주도까지 와서 돈가스 먹고 가라 하기가 뭐해서 삼키곤 했다.
마지막은 내가 특히나 좋아했던 '포케 트럭'.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게스트하우스 셰프님이 해주시는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종종 포케 트럭에 가기 위해 혼자 빠져나왔다. 아보카도를 얹은 연어덮밥이 내 입맛에 정말 꼭 맞았다. 밥을 먹고 있으면 뽈뽈거리며 발 밑을 돌아다니거나 가만히 옆을 지키던 강아지들도 행복지수를 올려줬다. 야무진 식사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오면 식탁에 둘러앉아있던 식구들이 '너 또 포케 트럭 갔다 왔냐?'며 한 마디씩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