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끌고 집 앞 바다에 나가요

제주살이 100일 no.5

by 치즈미

제주에 살아서 제일 좋은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슬리퍼 신고 패딩 대충 걸치고 월정리 바다로 나갈 때라고 하겠다. 내가 정말 여기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꽉 찬다.

그리고 가끔 그렇게 후리하게 하고 가면 가게 사장님들이 어떻게 왔냐고 물으시는데, '저 요 위에 살아요'라고 말할 때, 같은 마을 주민이라는 친밀감이 형성 될 때도 왠지 짜릿하다.

IMG_1290.JPG 어느 날 언니들과 찍은 슬리퍼 샷


나는 카운터 스텝을 한 달 하고 나머지 두 달은 일반 스텝으로 일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 스텝으로 바꾸면서 비로소 제주에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쉬는 날은 당연히 자유롭게 놀 수 있고, 일하는 날에도 자유 시간이 꽤 많이 주어졌다. 아침에 청소를 빨리 끝내면 저녁 바베큐 준비 전까지 4-5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스텝을 하다가 카운터 스텝으로 바꾸고 만족한 사람들도 많으니 이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인 듯싶다.)


여하튼 일반 스텝으로 근무한 첫날. 갑자기 쉬는 시간이 보장되자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느낌이었다. 기타도 다시 칠 수 있을 것 같고, 책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원래는 다른 스텝들과 노래방에 가려다가 그냥 혼자 빠졌다. 온전히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더구나 오랜만에 해가 내리쬐는 기가 막힌 날씨에 노래방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껏 햇살을 즐겨야 했다.

IMG_3839.JPG 증말 기가 막혔던 날

여유롭게 노래를 들으며 슬슬슬 청소를 끝내고 육지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에 듣는다던 연기 수업이 어떤지 궁금했고, 어떻게 사는지도 듣고 싶었다. 친구와의 전화는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제주에 있는 동안 잊고 살았는데, 역시 친구는 친구다. 참 편하게 코드가 잘 맞았다. 연기 수업은 한마디로 똥망이랬다. 함께 감독을 욕하고 요즘 만들고 싶은 콘텐츠에 대해 즐겁게 대화했다. 통화 하며 해변 쪽으로 내려가다가 빵집에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월정리 '달빵'.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앙버터가 너무 먹고 싶었다. 가게를 못 찾아서 헤매는 시간도 혼자여서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돌담과 바람, 하늘, 풀을 크게 들이쉬며 눈에 담았다.


전화를 끊고 들어선 달빵은 아주 작은 가게였다. 사장님은 무뚝뚝하지만 좋은 분 같았다. 앙버터와 차를 시키자 서비스로 우유를 주셨다. 아, 정말 이상적으로 포근한 오후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앙버터는 가게마다 맛과 모양이 다 다르다. 이 곳은 크로와상으로 겉을 덮었고 캐러멜처럼 달달한 맛이었다. 앙버터를 베어 물고, 고소한 우유와 쌉쌀한 차를 번갈아 마시고, 따뜻한 공기에 재즈 음악이 나오고, 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빵을 거의 다 먹은 후엔 읽고 있던 '상실의 시대'를 조금 더 읽었다. 분위기 덕인지 집중이 잘 됐다. 혼자 있으니 떠날 타이밍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 더 행복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이제 그만 가볼까 싶을 때 딱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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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달빵 뷰'와 탐스러운 앙버터


게스트 하우스에 들러 건조기만 돌리고 다시 나올 생각이었는데 다른 스텝들이 건너편에서 밥을 먹는다길래 합류하기로 했다. 오전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충전했기에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었나 보다. 얼굴들을 보자 괜히 되게 반가웠다. 오늘의 식당은 게스트 하우스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그때 그 집'. 김치찌개 집이다. 제주도에만 체인이 꽤 있고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고들 한다. 오픈 기간이라 그런지 값이 굉장히 쌌고 계란 프라이도 무한리필이었다. 넷이 즐겁게 밥을 먹었다. 계속 행복하다고 하는 것도 좋고, 서로 놀리는 것도 좋고, 그냥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이 사람들 다 좋다. 정들었다. 잘 맞아졌다.


그 분위기는 오후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저녁 바베큐 때는 복근이 생길 때까지 웃고 떠들었다. 내친김에 다음 날 피크닉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일하는 사람도 쉬는 시간이 넉넉하니 문제없다. 도장 꽝꽝. 스텝들이 떠나고 또 바뀌지만 정말 좋은 사람들뿐이다. 일반 스텝으로 바꾸길 잘했다. 나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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