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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Oct 01. 2019

작은 우산이나마 드리워주고 싶었습니다 <시카고 타자기>

진수완 작가, 김철규 감독

*스포일러 아주 약간 있음*


한세주 작가님, 팬이에요.

그때 이미 난 알았다니까.
이 사람 굉장한 작가가 되겠구나.
그때부터 쭉 응원했어요.
지금 잡은 지푸라기가 동아줄이 돼라.
글이 밥이 되고, 밥은 또 글이 돼라.

그리고 빌어줬어요.
고단한 인생이 이 사람의 발목을 붙잡지 않기를.
그건 그저, 신이 위대한 작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준비한 잠깐의 시련이기를.
지금 겪는 고통의 시간이, 시련기가 아니라 수련기이기를.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4화



'~씨 팬이에요'는 우리가 너무 흔하게 쓰는 말이라 별 감흥이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팬이라는 건 이 세상에 남은 몇 안 되는 순수한 감정 중 하나다. 순수하게 이타적인 감정. 네가 잘 될수록 나도 더 행복해진다. 특히나 작가의 팬이라는 건, 그 사람을 통째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사랑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보다 더 로맨틱한 감정이 있을까?

진수완 작가가 이런 진솔한 감정 코드를 성실하게 녹여줘서 설이와 세주의 사랑이 진부하지 않았다. 찡했다.

설이가 지치지 않고 그 마음을 계속 고백해줘서 고마웠다. 세주는 그 진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바칠 게 청춘밖에 없어서

죽어서도 잊고 싶지 않은, 잊지 말아야 할, 사연이나 사람이 있었던 걸까?

-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5화


우리가 왜 총을 쥐어야 했는지. 우리의 마지막은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6화


그때 바쳐진 청춘들한테도 전해줘. 고생했다고. 이만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작가님도 그때 청춘이었으니까요.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9화



대개 하고 싶은 말을 대사로 다 뱉어버리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연기가 후덜덜해서 그런지 서사가 잘 쌓여서 그런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찡할 뿐이었다. 독립을 위해 뛰어든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작가는 왜 전생을 선택했을까. 독립이라는 너무 큰 간절함 앞에서 다른 모든 감정은 가슴에만 묻어둬야 했던 사람들.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도 끝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린 사람들. 그들이 환생해서라도 마음껏 사랑하도록 해주고 싶었던 건가. 너무 따뜻한 마음이다. 대본집 작가의 말에 보면 진수완 작가는 광화문 광장 앞에서 소녀상과 우산을 나눠쓰는 경찰의 사진을 보고 저런 드라마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긴말이 필요 없는, 미사여구나 훈계질 따위 없는, 그저 누군가에게 조용히 드리워지는 우산 같은 드라마.' 고생했다고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유령을 창조해낸 것 같기도 하다.



그대는 먼지를 털어 읽어주오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대본집부터 샀다. 제목이 한몫했다.


시카고 타자기.

나는 이 단어가 왜 이렇게 멋있지? 제목에 벌써 아련함이 묻어있다.

뮤지컬 '시카고'의 영향인지 퇴폐미도 느껴지고.

옛날 감성 좋아하니까.


그런데 사실 4화까지 봐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유령작가, 혼이 담긴 타자기, 경성시대... 흥미로운 요소는 많은데 뭉쳐지지가 않았다. 남자가 갑자기 넘어지려는 여자의 허리를 잡아주거나 남녀가 바닥에 떨어진 팥을 줍다가 샤랄라 하면서 반하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로맨스 장면이나 계속 나오고... 솔직히 말하면 오버스러운 장면의 남발이었다.


5화 마지막에 유진오가 유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8화가 되어서야 드디어 유진오와 공동 집필 협약을 맺는다. 차라리 전설과의 현생 로맨스에 힘을 좀 뺐으면 좋았을 것 같다. '작가님 팬입니다' 할 때의 감동은 그대로 가져가되, 유령작가의 존재나 세주가 가지는 작가로서의 고뇌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2화 마지막쯤 유진오의 정체를 밝혔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 텐데. 로맨스는 유령작가와 전생이라는 키포인트를 밝힌 후에 훅 진행했어도 될 것 같다. 참고로 세주와 설이의 시원시원한 직진 로맨스 대환영이었다.


또 사실 백태민 작가가 너무 재미없는 악역이었다. 매력이 티끌만큼도 없다. 현생이나 전생이나 설이한테 시간 내달라고 생떼만 부리고 말이야. 자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나? 정말 구도를 갖추기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백태민과 그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올 때마다 넘겼다. 경성, 독립투사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환생해서 어떻게 엮여나가는지가 궁금했지. 그래서 백태민에게도 공들인 서사를 부여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악역은 스네이프처럼' 지론자니까.


여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후반으로 갈수록 모든 게 용서된다. 사랑에 빠지면 다 괜찮아지니까.

아래는 마음에 쿡 박혔던 장면들. 사실 더 많지만 몇 개만.


12화


13화


15화는 미쳤음


16화도 미쳤음




다 보고 나면 후유증이 오래가는 드라마다. 서휘영과 한세주는 다른 사람일까. 류수현과 전설은 다른 사람일까. 그럼 서휘영과 류수현은 어디로 간 걸까. 기억 속에만 그렇게 남는 걸까. 유진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결말도 참 담백하다.

아, 그리워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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