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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Feb 16. 2020

흑사병에 맞서는 뭉클한 SF역사소설 <둠스데이북>

드라마화 성공 가능성: 4

*스포일러있음

장르

역사물,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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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4년,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시대로 타임슬립 한 어린 역사학자가

한 마을에 정착하여 역사책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며 역사를 다시 기록해 나가는 SF



배경 설명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들은 복잡한 좌표 설정 후 '네트'를 통과하여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편차 등 여러 변수는 존재하지만 사료를 조사할 수 있는 귀중한 발전이다. 중세시대 전문 브레이스노즈 칼리지, 20세기 전문 베일리얼 칼리지, 르네상스 시대 전문 모들린 칼리지, 뉴칼리지, 지저스 칼리지 등으로 나뉘어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중세시대 조사가 꿈이었던 베일리얼 칼리지 학생 키브린은 아직 충분한 사전 검사가 이뤄지지 않은 중세시대로의 모험을 떠난다.



셀링포인트

[만반의 준비를 갖춘 고의적 타임슬립]


퐁당퐁당 LOVE, 명불허전, 혹은 사랑의 불시착까지, 다른 환경으로 떠나는 여타 드라마를 많이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우연에 의한’ 시작이었다. <둠즈데이 북>은 판타지가 아닌 SF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춰 철저히 준비를 한 후 고의적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키브린은 중세시대의 언어를 비롯해 라틴어, 독일어 문법 등을 배우고, 번역기를 장착하고, 소젖 짜는 법이나 달걀 모으는 법 등의 노동을 익히고, 각종 예방 접종을 받는다. 심지어 날마다 발굴 현장에 나가 흙을 파헤치며 성실하게 손톱의 때까지 묵힌다.

각종 첨단 장비를 활용한 준비과정 자체도 흥미롭고, 현대의 계산이 실제 중세시대 현장에서 어떻게 어긋나는지 보는 것도 재미 포인트다. (따지고 보면 좌표 실수로 28년 뒤의 시대에 떨어지니 이것도 결국은 우연인가..)



[칼리지별로 다른 시대 연구-시리즈물의 가능성]


일명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로 불리는 코니 윌리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세계관이다. 옥스퍼드 유니버스 안에서 각 칼리지 별 에피소드도 만들 수 있고, 다른 시대의 인물들끼리 만나거나 스핀오프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블랙아웃'등 그녀의 다른 책 속 인물들도 연결된다.

그중 이 책은 베일리얼 칼리지의 던 워디 교수의 가치관 중심이다. 초반에 잠깐 존 클린 수사라는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흑사병이 휩쓴 수도원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그는 자신이 목도한 재난에 대해 담담히 기록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글을 썼기에 글씨도 점차 희미해졌다. 이 이야기를 계승하듯 베일리얼 칼리지의 역사학자들(키브린은 브레이스 노스 소속이긴 하지만 던 워디 교수의 수제자 느낌이 강하기에)은 책상 앞에 안전하게 앉아있기보다는 직접 현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딱딱하게 기술된 역사책의 이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던 워디 교수 말처럼 '집에 안전히 머물러만 있어선 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역사학자들의 가장 큰 소원은 그 시대 사람을 직접 만나보는 것일 텐데, SF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한 줄짜리 문장으로 지나치고 말 기록들 너머에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자신만만하고 당돌했던 주인공의 변화]


키브린은 중세시대로 가겠다는 자신의 목표 앞에 서슴없다. 교수가 언어적 장벽을 예로 들며 반대하면 해당 언어를 다 마스터해버리며 절대 굽히지 않는다. 똑똑한 그녀의 능력으로 불가능이란 없다. 물론 신 따위도 믿지 않는다.

타임슬립 후 처음 흑사병의 징조를 알아차렸을 때, 기도만이 답이라는 중세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종기를 칼로 째고, 격리시키고, 약초를 달여 먹이며 사람들을 살려낸다. 그러나 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녀조차 전염병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신을 떠올린다. 신에게 ‘개새끼’라고 욕하면서도 정든 마을 사람들을 지켜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럼에도 신은 무자비하게 마지막 한 명까지 앗아가 버린다. 재난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주인공에게 강한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서사다. 또한 인간의 과학적 능력 최대치를 자랑하는 SF 장르에서 신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각색 방향

[타임슬립 때문에 흑사병이 시작되었다는 상상]


병에 걸린 채 중세로 타임슬립 한 여주인공 때문에 흑사병이 시작되었다는 설정인가? 싶어서 굉장히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키브린은 중세에 도착하자마자 오한에 시달리며 크게 앓는다. 또 2권에 가면 그녀가 현대에서 발굴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병에 걸렸던 것임이 밝혀진다. 바이러스의 생존력은 아주 강해서 동면된 미라에서도 아직 발병 가능한 바이러스가 나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 시작이 키브린인지 미라인지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운명의 굴레! 이런 것을 기대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가끔 SF에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곤 하니까. 미라에 잠복하던 바이러스 때문에 병에 걸린 키브린 --> 타임슬립 한 그녀 때문에 흑사병이 유행한 중세--> 그 여파로 죽은 어느 중세 사람의 미라에 잠복한 바이러스 --> 그 현장을 발굴하다 병에 걸린 그녀...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으니 결국 현대와 중세의 질병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각각의 이야기였다. 처음 상상한 대로 현대와 중세의 연결고리를 강화한다면 훨씬 모험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로슈 신부님과의 러브라인]


사실 중구난방으로 러브라인을 넣는 게 껄끄럽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로슈 신부님만큼은 지키고 싶어 한 키브린의 마음이 너무 애틋해서 살짝 가미해도 괜찮을 것 같다. 특히 로슈 신부는 키브린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요란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둘이 동료로서 치료에 전념하다가 마지막 죽기 전 즈음에 조용히 사랑 고백을 하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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