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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Mar 15. 2020

왜 진작 읽지 않았나 후회되는 <헝거게임> 시리즈

드라마화 성공가능성: 4


*매우 매우 스포일러임


[생존게임 디스토피아라는 기발한 설정]

<헝거게임>은 말도 안 되는 극한 설정으로 최강의 몰입력을 자랑한다. 생생한 묘사도 한 몫한다. 1권을 펼치고 3권까지 숨도 안 쉬고 읽었다는 리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영화도 봤지만 감정 이입하기에는 디테일한 책이 최고다.

캐피톨이라는 중앙 지역이 있고, 이들이 1구역부터 12구역까지의 사람들을 다스린다. 각 구역은 산업, 어업 등을 대표하고 자신들의 생산물을 캐피톨에 바쳐야 한다. 그 덕에 캐피톨은 저 세상 호화스러움을 자랑하지만 나머지 구역은 가난하고 철저하게 통제받는다. 예전에 한 번 13구역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살된 이후, 캐피톨은 '헝거게임'을 창시했다. 반란하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기 위해서란다. 매년 각 구역에서 청춘 남녀 한 명씩을 뽑아 최후의 생존자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이다. 캣니스라는 평범한 여자애가 헝거 게임에서 승리하고 점차 독재에 대항하게 되는 이야기로 넓어진다.

다가올 일을 예상하는 동안 긴장감은 공포로 바뀐다.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단 한 시간 안에 완전히 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
나는 다쳤지만, 도움을 받고 싶다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지원을 받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주저앉기를 거부하는 모습에 감탄한 사람들이 도움을 보내준다. — 어쩐지 ‘나의 아저씨’가 생각나는 대목.
신나는 배경음악이 깔려 있어 두 배는 더 끔찍한데, 그 이유는 물론 등장인물 대부분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가장 폭발적인 전복, 침묵]

12구역 사람들은 세 손가락을 들어 경의를 표한다. 그들만의 전통이다. 동생 대신 헝거게임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캣니스에게 12구역 사람들은 세 손가락을 들었다. 단순한 경의를 넘어, 야만적인 캐피톨을 향한 무언의 시위 같은 의미였다. 워낙 잔인하고 억압적인 캐피톨의 독재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조용한 행위가 어떤 저항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게임에서 죽은 루의 시체를 꽃으로 덮어준 캣니스의 진심을 본 11구역 사람들도 그녀에게 같은 행위를 했다. 국경을 넘어 연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극한 억압 속 침묵의 임팩트는 크다. 비언어의 힘이 가장 세다.



[푹 터지는 생크림처럼 숨길 수 없는 따스함]

캣니스는 절망 속에서 식량을 얻었던 날 본 민들레를 잊지 못한다. 또 헝거게임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빵이 11구역에서 온 것임을 확인한다.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 멀쩡한 청춘을 죽음으로 내모는 잔인한 게임에서, 루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하필 '음악'이라고 대답한다. 캣니스가 분초를 다투는 죽음과 사냥과 고름과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피타는 그녀에게 '키스 어때?'라고 묻는다. 지나칠 정도로 순진한 그 물음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또 다른 참가자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고 중얼거림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던 11구역 남자아이는 루를 죽인 참가자를 보자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소리를 질러댄다. "그 꼬마 여자애 어떻게 했어? 네가 죽였어?"

이렇듯, 이 작품은 가장 삭막한 설정을 해놓고 그 속의 작지만 강력한 희망의 씨앗을 지속적으로 말한다. 지독한 세상에서 노골적일 정도로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야기를 계속 찾는 이유도 그렇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언제가 루가 떠오릅니다. 저희 집 근처 초원에 자라는 노란 꽃을 보면 루가 보입니다. 숲에서 노래하는 흉내어치를 보면 루가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제 여동생 프림에게서 루를 봅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이제 거의 끝나간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빵을 보내주셔서 모두 고맙습니다."
긴 침묵이 흐른다. 관중 속 누군가가 루가 흉내어치에게 불던 네 개의 음으로 구성된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분다. 과수원에서 일이 끝났다는 신호로 불던 멜로디다. 경기장에서는 안전함을 의미했던 멜로디. 관중들은 모두 왼손 가운데의 손가락 세 개를 입술에 댄 다음 내 쪽으로 팔을 뻗는다. 12번 구역의 관습이고, 내가 경기장에서 루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로 했던 동작이다.

그리고 휘파람을 분 할아버지는 총살당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이야기는 늘 응원하게 된다]

캣니스는 믿음직한 히어로가 아니다. 도망치고 싶고 무섭고 못하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덜덜 떨고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서 독자는 감동한다. 강력한 히어로가 아니라, 부딪히고 깨지는 히어로. 문득 해리포터나 스파이더맨, 기묘한 이야기의 친구들도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드라마로는 <블랙독>이나 <마더>가 생각났다.

도망치고 싶다. 마주할 용기도 없는 이런 일은 엄마와 프림에게 맡겨 두고, 가서 사냥이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특별히 위중한 환자를 대하실 때 취하는 차분한 태도를 나는 따라 하려 애쓴다.
끈끈해진 화살을 통에서 꺼내 시위에 메기려 하지만 줄이 세 개로 보인다. 벌 독이 만들어낸 고름의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못하겠다. 못하겠어. 못하겠어.
꽤 오랫동안, 물병에서 조금씩 물을 마시며 인동덩굴 옆을 기어가는 딱정벌레를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루의 손을 잡고 루에게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뭔가가 변했다. 이제 나는 루의 복수를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 루의 죽음을 잊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이겨서, 날 잊지 않게 해야만 한다.

— 이런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우리의 히어로가 자꾸 생각나는 것 아닐까?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캣니스. 그럼에도 우리의 주인공은 마냥 천사표가 아니라는 게 매력 포인트다. 항상 가시가 돋아있고, 생존에 계산적이다. 가족과 친구를 위해 목숨도 내어줄 만큼 따뜻한 가슴을 가졌지만 살기 위해서. 주변 환경 때문에 억지로 차가워진 케이스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착한 피타 멜라크는 나에게 못된 피타 멜라크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다. 착한 사람들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성향이 있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이 곳이 너무 따스하다]

캣니스는 헝거게임을 치르기 전 생애 가장 호사스러운 시간을 누린다. 그저 캐피톨이 제공해주는 서비스에 푹 빠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잊지 않는다. 거위가 푸아그라가 되기  포식하는 것처럼, 그녀가 처한 불편한 진실을 문득문득 떠올린다.  아이러니가 그녀의 상황을 더욱 애처롭게 만들어주는 포인트다. 어쩌면 친절한 신입사원 공채 면접 같은 느낌이라 더 감정이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녀는 캐피톨이 만들어주는 화려한 자신이 아닌, 결함 투성이지만 진실된 본모습을 잊지 않는다.

나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고, 산해진미를 먹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관중들이 나를 죽이는 사람을 응원하는 가운데, 피범벅이 되어 죽으러 온 거다.
우리가 친구여야 하는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분하는 게 너무 힘들다.
이게 다 무슨 쇼람! 피타와 내가 친구인 척하다니. 서로 상대의 장점을 칭찬하고, 너의 능력을 인정하라고 서로 우겨대고. 용납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언젠가는 그런 짓거리를 다 집어치우고 우리가 냉혹한 적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천천히, 꼼꼼하게 얼굴의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원래대로 땋으며, 나는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변신을 시작한다. 캣니스 에버딘. 경계에 사는 여자애. 숲에서 사냥하고 호브에서 거래하는 아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를 기억하려 애쓰며 거울을 노려본다.



[너무나 재밌는 삼각관계 클리셰]

<헝거게임>은 SF, 디스토피아를 표방한 로맨스 장르라고 하겠다. 오랫동안 티 내지 않고 그녀만을 애타게 짝사랑했던 잘생긴 동네 친구 게일과 공개적으로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하는 새로운 남자 피타, 그리고 캣니스 사이의 삼각관계다.


캣니스는 캐피톨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헝거게임에서 필요한 물품을 지원받기 위해 로맨스 전략을 펼친다. 피타와 자신이 사랑에 빠졌으나 서로를 죽여야 하는 비운의 참가자인 척을 하는 것이다. 예상대로 캐피톨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참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방송하는 캐피톨의 방식 때문에 별 말은 못 하지만 캣니스는 당연히 피타도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차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피타를 이용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생존만 생각하려 애쓴다.

눈을 뜬 피타는 영원히 그렇게 누워 나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할 거라는 듯 미소를 짓는다. 참 대단한 연기력이다.
"그럴 필요는 없어. 내 악몽은 보통 너를 잃는 내용이거든. 네가 여기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괜찮아져." 피타는 이런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마치 주먹으로 배를 맞는 것 같다. 내가 피타를 아주 나쁜 방식으로 이용해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정말 그랬나? 모르겠다.
그는 건성으로 입맞춤을 해서 나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다. 피타는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 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울고 싶어 진다.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피타를 일으켜 세운 후, 장갑 낀 손으로 팔짱을 끼고는 발랄하게 데리고 걷는다.
피타가 꽃다발을 내밀었을 때 나는 기쁜 척하려고 애를 써본다. 저 핑크색과 흰색 꽃들은 야생 양파의 꽃이고, 게일과 함께 야생 양파를 채집하던 시간을 떠올리게 할 뿐이라는 걸 피타는 알 수가 없으니까. 게일. 몇 시간만 있으면 게일을 본다고 생각하니 뱃속에서 뭔가가 막 흔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러는 걸까?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에게 그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기분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믿어주는 두 사람에게.


언론을 통해 실컷 커플 연기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캣니스. 그녀도 게일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후였다. 게일과 자신의 상황이 뒤바뀌었다면 그녀는 질투심과 분노로 마음이 까맣게 곯아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옛날처럼 게일과 둘이서만 숲 속으로 사냥을 떠난다. 숲에서 나가는 마지막 순간 게일은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키스하고 말한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적어도 한 번은.”
그리고 그는 가버렸다.


사실 어장관리를 하는 듯한 주인공에게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읽는 게 재미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든 캐릭터에 대한 인간적인 짠함의 시선]

주인공뿐 아니라, <헝거게임>은 밉상 캐릭터까지도 짠하거나 매력적인 구석을 보여준다.

에피 트링켓은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 단호한 결단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헤이미치도 어쩌면 언제나 주정뱅이였던 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처음에는 조공인들을 도와주려고 애썼는지도 몰라. 하지만 참을 수가 없게 된 거겠지. 아이 둘을 훈련시킨 다음에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지옥 같았을 거야. 해마다, 해마다, 또 해마다.

헝거게임에서 그 날 죽은 참가자들의 얼굴을 하늘에 띄워줄 때.

약 10초 정도 스레쉬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 있다가 사라진다. 그렇게 쉽게 가는구나.

피타가 캣니스의 모든 로맨틱한 행동이 헝거게임에서 살기 위한 연기이자 전략이었음을 알게 된 후.

"한번 더? 시청자들을 위해서."
피타는 화난 목소리가 아닌, 공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빵을 준 소년은 벌써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중뿔나지만 진심을 보여주는 멘토]

헤이미치는 12구역에서 캣니스와 피타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멘토다. 그러나 그는 매일 술에 절어있다. 인터뷰 무대에서 휘청거리며 떨어지고, 카메라를 향해 분노의 삿대질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캣니스의 진심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다. 거칠지만 진심으로 조언해주고, 결정적인 순간 가장 임팩트 있는 도움을 준다. 헝거게임에 들어가기 직전, 더 조언이 없냐는 캣니스와 피타에게 그는 말한다.

살아남아라.

그 어느 말보다 가장 간절하고 강력한 조언이었다. 한편 캐피톨에서 캣니스의 의상을 디자인하는 시나도 재밌는 멘토다. 캐피톨 사람들은 인형처럼 바보 같은 억양으로 말하고, 파티에서 토하는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포식하고, 말도 안 되게 기분이 고조되어 있다. 가식적인 캐피톨에서 캣니스가 만난 유일하게 시크하고 솔직한 시나. 덕분에 캣니스도 매달릴 구석을 찾는다.

나는 돈을 거는 일이 금지되어 있지만, 만약 걸 수 있다면 너에게 걸 거야. 진심으로, 행운을 빌어, 불타는 소녀.

작은 진심은 언제나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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