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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Mar 26. 2020

아, 따뜻하고 세련되고 다 하는 당신! 테드 창 <숨>

드라마화 성공 가능성: 각색력에 따라 상이

모든 작품이 심오하면서도 선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어서 놀라웠다.

9가지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3가지를 자세히 파먹어보자!


*스포일러있음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의외로 가장 많은 위로가 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한 신비한 가게에서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문을 발견한다. 가게 주인은 그 문을 통과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들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문을 통과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나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그들이 돌발적이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도 결국은 정해진 운명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주인공도 죽은 아내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고 문을 이용해 과거로 가지만 똑같은 일을 다시 겪을 뿐이다. 과거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게 이야기의 요지다.


이렇게 말하면 웬 비관적인 소설인가 싶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나 미래가 바뀌지 않음을 아는 것, 더 나은 결말은 없으므로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많은 시간을 후회하며 보낸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 지금 더 행복했을 텐데. 그러나 실제 과거에 갔다 왔는데도 바뀌는 게 없다면 더 이상 쓸데없는 자책을 할 필요가 없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말이 어쩌면 가장 희망적이다. 테드 창도 창작 노트에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따뜻한 사람!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맨 처음 등장한 소년 하산의 이야기다. 그는 가난했지만 미래의 자신이 부자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나이 든 하산은 어린 하산에게 모든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적절한 경고를 보낸다. 덕분에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 소매치기범을 죽어라 뒤쫓아 잡지만 그 소년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는 자비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나이 든 자신에게 찾아가 왜 경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나이 든 하산은 '즐겁지 않던가?'하고 묻는다. 실제로 잡게 될지 놓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마구 달리는 동안, 하산은 오랜만에 피가 끓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삶은 한 치 앞을 모르기에, 적어도 그렇다고 착각할 수 있기에 아름답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디지언트'라는 성장형 인공지능을 개발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인공지능이지만 실제 아이가 성장하는 것처럼 학습하며 자라나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할 때 고민해야 하는 지점들을 많이 짚어볼 수 있는 단편이다.


[20년만큼 알고 싶다면 2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을 데이터베이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특성은 예외 없이 경험의 산물이었다.


흔히 어른들 말은 틀린 것이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렇다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어른이 던져주는 떡을 쏙쏙 받아먹어야 할까? 아니, 오히려 손해다. 안된다는 말만 듣고 지레 도전하지 않는 것과 내가 직접 겪어보고 깨끗이 포기하는 건 천지차이다. 또 어차피 대부분의 경우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경험, 경험, 경험. 경험의 힘이다.


얼마 전 본 영드 <이어즈&이어즈>에서도 똑같은 맥락의 장면이 있었다. 한 여자가 방사선에 피폭되어 시한부 판정을 받자 뇌 데이터를 복사하여 몸 없는 인공지능으로 재탄생하려 한다. 실험실에 누운 채 그녀는 말한다. "당신들이 저장한 것들과 다운로드한 것들, 복사한 그것들이 정말 어떤지 당신들은 모르죠. 이 기억들은 사실에 그치지 않아요. 그 이상이죠. 사랑. 내 본질은 그겁니다."


그녀의 기억은 그냥 데이터가 아니다. 본 것, 냄새 맡은 것, 관계 맺은 것, 매 순간마다 복잡하게 얽혀 고유의 '경험'으로 저장된 그것은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교훈 한마디 듣는다고, 데이터를 주입한다고 그 사람의 깨달음을 공유할 수 없다. 한마디로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지름길이란 없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디지언트의 자유의지]

설령 그런 경험 전체를 스냅숏으로 찍어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그 복제들을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을 통해 태어난 모든 디지언트는 각자 하나의 생애를 살아왔을 것이다. 한때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소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각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자유의지가 있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의식이 있는 디지언트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우습게 본다. 그에 따른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게 몇 개 있다.


디지언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경우 인간은 즉시 버튼을 눌러 디지언트의 의식을 특정 포인트로 되돌릴 수 있다. 예를 들어 'xx!'라는 욕을 하는 경우, 누군가에게 그 욕을 들어서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을 들은 시점을 찾아 의식을 되돌린다. 그리고 욕을 듣지 않는 다른 상황을 조성한다. 그러면 디지언트는 영원히 욕을 학습하지 않게 된다. 아예 원천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입맛에 맞게 버튼 하나 누를 뿐이지만 디지언트는 욕뿐 아니라 그 시간 동안 학습한 모든 경험을 잃게 된다. 그를 구성하는 정체성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책에는 여러 데이터 공간이 나온다. 각 공간은 하나의 지구와 같아서 여러 마을이나 놀이 시설 등을 끝없이 지을 수 있다. 공간이 업데이트되어 모든 디지언트들이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가는데, 잭스를 비롯해 업데이트할 수 없는 구형 모델은 새로운 공간에 접속하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잭스라는 디지언트는 구형 공간의 아파트에 갇힌 채 지루한 나날을 이어간다.


남은 사람들. 디지언트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감정 이입했기에 할 수 있는 상상이다. 인물을 기능적으로 보지 않으면 이렇게나 새로운 관점을 지닐 수 있음을. 갑자기 영화 <전우치>에서 그가 분신술로 여러 명의 자신을 소환한 도술이 생각난다. 어쩌면 그 분신들도 하나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본다면, 재밌는 상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팠던 대화. 그 어느 때보다 쓰임새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이 시대를 잘 비춰주는 장면을 꼽아봤다. 디지언트들을 섹스 상대로 개발하려는 기업이 애나에게 던지는 질문.


"현재 여러분의 디지언트는 놀라운 존재이긴 하지만 돈이 되는 직업 능력이 없고, 훗날 그걸 습득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달리 어떤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시려는 거죠?"
애나는 이 말을 듣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하라는 얘긴가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가장 스토리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 단편이었다. 사람들은 프리즘이라는 기계를 통해 평행세계의 자신과 소통할 수 있다. 문자, 음성통화, 영상통화, 파일을 주고받는 것까지 가능하다. 단 단계가 높아질수록 데이터를 많이 쓰듯 패드 소모가 많아진다. 정해진 패드를 다 소모하고 나면 그 세계와의 연결은 영원히 끊어진다. 평행세계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든지 하는 특정 시점에 분화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이 생길 수 있다. 또, 프리즘을 활성화하면 두 개의 산소 분자가 충돌할지 스쳐 지나갈지부터 해서 나비효과처럼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각 세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같은 사고가 나도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하고, 자신보다 잘 나가는 평행세계 속 자신을 보며 절망하기도 하고, 같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평행세계에서 발간된 여러 버전의 소설을 비교하기도 하는 등 재미있는 소재가 많이 나온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차피 평행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자신이 있을 거고, 그중 어떤 자신은 나쁜 짓을 하며 끌리는 대로 편하게 살 텐데, 왜 그게 이 세계의 자신이면 안되냐고 묻는다. 이 세계에서 힘들게 착하게 살 이유가 무엇이냐고. 작가는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답을 준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는겁니다. ...미래에 분기될 세계들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당신이 선한 선택을 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미래에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어떤 개인의 성격이 그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라면, 그와 비슷하게 그 개인의 성격은 그가 여러 세계에서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여러 개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명의 마르틴 루터들을 조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교회의 권위에 거역하지 않은 루터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세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구간도 많고, 메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냇이 사기에 휘말리는 이야기, 프리즘 중독자 모임 이야기, 데이나의 트라우마 등 서사가 가장 드라마틱하고 인물 설정이 잘 되어있는 단편이라 아주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화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제목의 의미도 아주 멋지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1844)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상반되는 내부 요소들을 규합하며 성장하는 존재임을 지적했고, 인간이 느끼는 불안은 특정한 본질에 의존하지 않는 이런 자유의지의 영역에서 오는 ‘현기증’이므로 구원 역시 이 자유를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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