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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Aug 26. 2018

미생과 혐생 사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졸업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이야 책 읽고 젤리나 씹으며 백수 생활을 만끽할 수 있지만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른다. 이러다 정말 직업을 못 구해서 아사하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눈 귀 막고 어서 을이 되기 위한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하나. 그런 인생이 무슨 의미일까. 이 나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텐데. 이러면 또 고민은 제자리다.


왜 직업을 구하는 일이 지옥처럼 느껴질까?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뭔지 알았고, 이제 즐겁게 일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자꾸 떠나고 싶다.




한국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 기회가 생겨도 굳이 한국을 떠나야 할 이유를 몰랐다. 주변에선 하늘이 준 기회이니 당장 떠나라고 윽박(?) 지르기까지 했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조금씩 내 생각이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연히 청와대 청원 목록을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확한 순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주 난민을 쫓아내야 한다는 청원과 대구 퀴어축제 반대 청원이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 사실 난 우리가 바뀌었다고 믿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쯤은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얼마 전에 노르웨이 드라마 SKAM을 정주행 했다. 가장 마음이 갔던 시즌 4의 주인공은 노르웨이에 사는 무슬림 여학생 Sana였다.


"Islam says the same thing as always. That all men, in this world, are of equal worth. And that no man shall be slandered, violated, judged, or ridiculed. So if you hear someone use religion to justify their hate, don't listen to them. Because hate doesn't come from religion, it comes from fear."

-Sana Bakkoush/ Skam


대충 번역하자면

이슬람의 가르침은 항상 같았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그 누구도 핍박받거나 조롱받을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 종교로 혐오를 정당화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것, 왜냐하면 혐오는 종교가 아닌 두려움에서 오니까.



또 오늘은 문유석 판사님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을 조금 읽었다.


'성숙한 가치 상대주의가 내면화될 때까지 의식적으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한 가치의 미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략) 그런 점에서 재벌 2세 신데렐라 놀음만 반복하는 대중예술 창작자들 (중략)이야말로 사회통합을 해치는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아닐까. 부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직업,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이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멋지게 그려내는 예술가들이야말로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혁명가들이다.'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中


이슬람을 믿지 않음에도 알라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슬람을 믿는다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알라의 진정한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자도,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며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이들이 '진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 페미니스트, 개인주의자, 성소수자' 등등의 단어는 어쩐지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여겨진다. '물'이나 '사과'와 다를 바 없이 자유로워야 할, 존재할 권리가 있는 당연한 단어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면 지나가던 누군가는 한번 더 돌아본다. 사실 이외에도 혐오를 말하자면 끝도 없다. 틀딱충, 맘충, 급식충, 개저씨, 흑형, 짱깨... 이들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부정적 성격으로 묶인다.



어제 본 '맘마미아! 2'도 생각이 난다.


극 중에서 어린 도나는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세 명의 남자와 사랑하고, 마음을 사로잡은 그리스의 한 섬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현실에서 그녀와 같은 캐릭터를 본다면 누군가는 '사회생활(이 단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못 할 아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어른이 돼라'며 비웃을 것이다. '조신'이나 '나댐'같은 고리타분한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물론 '멋있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훗날 빗물 떨어지는 그녀의 집 소식을 듣고 '그럼 그렇지'하며 자위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의 충만하고 자유로운 삶이 성숙하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정말로 성숙하지 못한 건 어느 쪽일까?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 그런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줌에 있어 주저해야 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함에도 말을 가려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기에 직업을 얻기가 두려운 것 같다. 그래서 문유석 판사님의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달콤한 이야기만을 해야하는걸까? 좀 공격적이면 안되는걸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정말 싫어할까?

이렇게 좌절하면서도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나 항상 잰다. '밝고, 행복하고, 빠릿빠릿해야 한다'라고 되뇐다. 누군가의 기준 ‘건강한 젊은 여자’에 걸맞기 위해 노력한다. 아사하지 않기 위해서.


왜 용기가 나지 않을까. 왜 나는 울타리를 깨고 나가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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