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를 위한 마음을 준비해줄게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

by gyuyeon 규연

비가 온다. 이른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깰 만큼 쏟아져 내리는 비.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쏴아-하고 큰 소리를 내며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면 바람에 따라 일렁이는 빗물들이 마치 파도 같다. 희뿌연 장막을 내 건 것처럼 하늘을 가득 채운 빗줄기가 세차게, 시끄럽게, 그리고 잔잔히 내려온다. 그렇게 빈틈없이 빽빽해진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연못에 비치는 잔상처럼 멀게 느껴진다. 수면 너머의 세상은 어제보다 짙어져 사람 없는 거리도, 흔들리는 나무도 성큼 다가오는 듯 진하지만 한 걸음 물러난 여기는 그저 흐릿할 뿐이다.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타고 집안까지 천천히 젖어간다.


물은 고요하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가지만 강도 바다도 작은 물줄기도 결국은 하나의 큰 웅덩이가 된다. 수많은 풍경들을 지나온 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잔잔하게 고여 있는 모습은 말없는 위로가 된다. 비가 오면 물기를 머금고 무거워지는 공기 때문에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이 되지만 장마의 초입에서 온몸으로 느낀 새벽 덕분인지 다음 주까지도 계속될 비가 두렵지 않았다.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은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둡고 잠잠한 호수가 잠에서 깨어나고 초록빛으로 가득 찬 아침이 되기까지의 천천한 흐름을 툭툭 내려놓듯 꾸밈없이 이야기한다. 형용사 하나만으로 채워지는 간결한 문장은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호숫가와 닮아있다. 호수는 조용하고 고요하게 아침을 향해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밤의 빛깔에 가까워 싸늘하고 축축한 어둠이 남아있다. 물기 가득한 수채화로 그려진 짙은 푸른빛의 호수 그림과 함께 책이 뿜어내는 물안개 같은 분위기가 읽는 내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차츰 호수 가까이로 시선을 당겨오면서 웅덩이처럼 둥근 그림의 테두리가 조금씩 넓어진다. 달빛이 비치는 바위와 나뭇가지, 멀리 산의 모습이 부드러운 곡선 속에 담기고, 배경이 점점 밝아지며 호숫가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에 초점을 맞춘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갑작스레 얼굴에 닿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손자를 깨우고 곧 이어 두 사람은 호수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낡은 배가 호수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산과 호수의 초록 속으로 들어가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기적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한참을 머무르게 만든다.


책을 읽는 동안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영장 수면 아래에서 숨을 참고 있으면 왠지 혼자 동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가벼운 두려움을 느끼곤 했었다. 모든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그 때의 생경함이 책을 읽는 내내 주변을 서성였다. 사실 ‘새벽’에는 줄거리라고 할 만큼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새벽의 호숫가는 물에 잠긴 듯 고요하기만 하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대사 한 마디 없는 할아버지와 손자 둘 뿐이다. 하지만 주변이 그토록 고요하기 때문에 작은 파동도 섬세하게 느껴진다. 잔잔하던 호숫가에 불어오는 실바람에 수면이 흔들리는 것을 ‘호수가 살며시 몸을 떤다’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미세한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물안개 같은 침묵 덕분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 것도 아닌 보통의 일들이 수면 위로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가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로 독자를 마주본다.


허공을 맴도는 외로운 박쥐도, 하릴 없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호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할아버지와 손자도 주인공이 아닌 그저 배경의 일부로 존재할 뿐 어느 것 하나 새벽의 고즈넉함을 깨뜨리지 않는다. 책장 전체가 하나의 빛깔로 물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산과 호수, 인간과 동물은 모두, 새벽의 경계에서 벗어나 아침의 거대한 빛 속으로 녹아들며 하나가 된다.




어디 하나 지나치는 곳 없이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물은 경계도, 차별도 없이 고요하다. 하늘의 물이 바다의 물이 되고, 땅의 물이 우리 안의 물이 되어 결국 하나의 큰 웅덩이가 된다. 하루 종일 새벽인 듯 흐릿한데도 날씨에 맞춘 듯 읽은 책 덕분에 내리는 비가 내게도 흘러들겠지, 생각하며 조금은 밝아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