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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Feb 06. 2021

내 생애 가장 추웠던 날들

엘 칼라파테 & 엘 찰텐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월 8일은 아침 최저기온 영하 18.6도로, 35년 만에 서울에서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됐다. 한국에서 맞이한 날들 중 제일 추웠으니 밖에 나갈 때마다 '우리나라 겨울이 원래 이랬나?' 떠올릴 수밖에. 하지만 내 생애 가장 추웠던 때는 따로 있다. 바람 한점 불지 않아도 온몸이 얼어붙을 듯 추운 날이면 꼭 생각나는 그곳, 파타고니아.  


달큰할 것 같았던 모레노 빙하


비수기 여행은 장단점이 뚜렷하다. 어딜 가도 한산하니 여유롭게 둘러보기엔 좋지만, 남들이 안 가는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히 자연으로 떠난 여행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날씨로 인해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찾은 엘 칼라파테는 추워도 너무 추웠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음에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추위였다. 주민들도 다른 곳으로 가서 겨울을 난다는 이 작은 동네는 관광객이 없어 스산함마저 느껴졌다. 찾는 이가 없으니 모레노 빙하 트레킹도 진행되지 않았다. 내심 아쉬웠지만 모레노 빙하에 도착하고 보니 트레킹 프로그램이 있었어도 신청했을 확률이 50% 미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가 빙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보트 투어를 소개했지만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깔끔하게 포기했다.

모레노 빙하

두 번째 빙하였다. 아이슬란드에선 악천후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기에 두 번째가 더 기대됐다. 다행히 날이 맑아 안 그래도 새파란 빙하가 더 파랗게 보였다. 한 조각 떼어내 입에 넣으면 소다 맛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멀리서 볼 땐 물 위에 떠 다니는 조각은 거뜬히 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빙하 크기가 40~70m에 달한다고 하니 저 조각도 1~5m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추위에 사람들이 빙하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근처를 서성였다. 빙하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잠시 기다리니 순식간에 '콰쾅' 소리가 나더니 쩍 하고 한 귀퉁이가 갈져 나와 물속으로 풍덩 떨어졌다. 응축된 세월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엄청났다. 단말마의 비명 같은 마지막 인사. 첫 장면을 영상에 담지 못한 게 아쉬워 계속 기다렸지만 두 번째도 예고 없이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카메라엔 담지 못하고 발을 돌려야 했다.


(온난화 때문에 빙하가 녹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2008년 가로만 50m에 달하는 빙하조각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기사를 찾아보니 온난화에도 모레노 빙하는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고.)

모레노 빙하



불타는 고구마를 만나다


평소 산에 가지 않지만 남미 여행에선 원하는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해 산에 자주 올라야 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에메랄드 빛 토레스 호수와 피츠로이 모습을 보았을 때, 이곳은 꼭 가야 하는 곳이 됐다. 조금 더 찾아보다 '불타는 고구마' 사진을 본 뒤로는 산행이 새벽 산행으로 난이도가 높아졌다.


캄캄한 새벽, 산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청바지에 운동화, 숄더백을 멘 채였다. 아이젠이나 등산 스틱은 물론, 랜턴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등산에 대해 모르니까 그냥 남들이 쉽게 올라가는 산이라고 하니까 너무 쉽게 생각했다. 겨울 새벽 산행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칼라파테에서 만난 Y와 함께 스마트폰 불빛에 의존해 길을 찾아갔다. 동네 전체가 암흑에 잠겨 있어 등산로 입구를 찾는 데만 1시간을 허비했다. 본격 시작도 전에 땀이 났다. 어딜 걷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 보이는 것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당시 유일한 선택지였다.


눈길을 한참 헤매니 어둠에 숨어 있던 나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멀리 피츠로이도 나타났다. 더 갔다간 애매하게 숲 속에서 '불타는 고구마'를 놓칠 것 같아 피츠로이가 잘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뜨기 전에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아니다. 그때가 제일 춥다. 몸이 굳는 걸 넘어 생각까지 멈추는 추위.

하얗게 빛나던 봉우리는 점점 끝부터 붉게 물들었다. 드.디.어! '얼음 땡'한 것처럼 굳어 있던 몸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니 한결 덜 춥게 느껴졌다. 호수에 비친 피츠로이를 기대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 가는 길은 대부분이 평지라 추위가 아니었다면 힘들진 않다. 문제는 마지막 1km다. 후기에서도 마지막 1km 구간이 가파르고 힘들단 얘길 들어 대피소(처럼 생긴 곳)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목도 추긴 뒤 길을 나섰다. 돌길이라고 봤던 것 같은데, 눈앞에 보이는 건 역시나 눈뿐. 한 400m쯤 올라갔을까. 앞서 가면 Y가 더 이상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올라가는 거야 어떻게든 올라가겠지만 내려오는 게 더 문제일 것 같다고. 장비를 갖춰도 위험할 판에 밑창 미끄러운 운동화로 오르다니 안 될 일이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걷는다기 보단 거의 썰매를 다듯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비로소 주변 풍경도 돌아보고 내 모습(보다는 꼴에 가까운)도 챙겨볼 여유가 생겼다. 셀카를 찍어보니 산악 영화에서 봤던 산악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땀이 났다 식어 머리카락은 얼어붙고, 눈썹과 칭칭 두른 파란 목도리 가장자리가 하얗게 변했다. 안 젖으려 조심했던 신발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 포기한 상태가 됐다. 그래도 날이 좋으니 기분만은 상쾌했다.


한참 내려가니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된 등산복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 스틱까지 든 모습이었다.

2017년 6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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