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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Apr 17. 2017

알함브라, 이상한 동행

한국인, 중국인 그리고 구글 번역

세비야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 안. 맨 앞자리에 앉아 운전석 창으로 3D 영상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옆 사람이 쓱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영어로 '혹시 아시아 사람이세요?'라고 쓰여있었다. 한국사람이라고 답하자 갑자기 엄청 반가워하며 "현빈(중국 발음이라 한참 있다 이해했다)"이라고 반복했다. 급기야 전화기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그 뒤로 송중기, 송혜교 이름을 대며 '한류 팬이다'라고 써서 보여줬다.


이후 침묵이 흐를 줄 알았는데 그녀는 '한국과 중국의 외교적 관계는 좋지 않지만, 민간은 그럴 이유가 없다. 나는 한국이 좋다'라고 얘길 이어갔다. 단어로만 대화할 땐 괜찮았지만 내가 긴 대답을 해야 할 땐 나 역시 휴대전화의 힘을 빌어야 했다. 그녀는 내가 하는 영어를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고작 한 달 배운 중국어 실력밖에 갖추질 못했다. 휴대전화 통번역 서비스로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건 TV 광고에서나 나오는 얘긴 줄 알았는데 이미 현실화돼있었다.  


이야기는 '여행'으로 옮겨갔다. 장기 여행 중이란 얘기에 "난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해"라고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터키, 요르단,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 간단한 인사말 말고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데 (사실 hello나 thank you란 말도 거의 쓰질 않았다) 세계를 돌아다닌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녀에겐 비결을 묻진 않았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 그녀는 '혹시 택시 타?'라고 물었다. 버스를 탄다고 하니 '혹시 같이 가도 돼?'라고 물었다. 대화를 할 때면 그녀와 나 모두 구연동화를 하듯 손동작이 커졌다. 자신을 한 번 가리키고 나를 가리키고 검지와 중지로 걸어가는 다리 모양을 표현하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대꾸했다. 우리 대화는 말보단 행동이 앞섰다. 버스 앞에서 짐과 사투를 벌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조용히 또 다른 짐 보따리를 들어주었고, 버스에선 요금을 낼 땐 내가 먼저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가 따라할 수 있게 했다.


버스에서 내려 '안녕'을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게 '알함브라'란 단어를 꺼냈다. 둘 다 예약을 못 한 처지라 새벽에 나가 줄을 서야했다. 또 다시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고 나를 가리킨 뒤 손가락 두 개로 걸어가는 흉내를 냈다. 구글 번역의 도움으로 만날 곳와 시간을 정하고 헤어졌다. 입으론 "밍 티엔 찌엔(내일 봐)"라고 인사를 했지만 반신반의했다. 나는 유심칩을 사지 않아 전화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녀는 왓츠앱을 쓰지 않아 메신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음날 오전 6시 30분. 그녀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내가 머물고 있는 호스텔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은 어색한 동행이 시작됐다.



@싱그러움
@아기자기함




입장 후엔 따로 또 같이 여행이 시작됐다. 각각 한국어와 중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알아서 설명을 듣고 끝나면 서로 눈을 맞추고 '끝났으니 가도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내 사진을 찍어주려 했다. 대화도 안 되고 어색할 땐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되는데 그게 사진이었을지도 모르겠따. 물론 날이 좋았고  배경은 더 좋았기에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풍경을 바라보다 멋진 앵글을 발견하면 '저기 가서 서라'는 손짓을 했다. 제 자리에 서지 못하고 머뭇댈 때면 다가와 몸으로 설명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나를 가리키고 그녀를 가리킨 뒤 사진 찍는 포즈를 취하면 그녀는 쑥쓰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교함



@놀라움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없는 대화가 익숙해졌다. 그리고 서로의 말하는 방식을 닮아갔다. 더블린에 살면서 친구들이 "It's Cool"이란 말을 워낙 많이 써 입에 뱄는데 언제부턴가 언니도 눈을 뗼 수 없는 풍경 앞에서 "Cool"이란 감탄사를 내뱉었다. 표현에 소극적이라 처음엔 영어로만 말하려 했지만 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처럼 몸을 쓰며 말하는 데 어색함이 없어졌다.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졌지만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청도에 산다는 것, 중국 고문학을 전공했다는 것.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나보다 4살이 많다는 것(그래서 이름 대신 한국 문화대로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고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다닌다는 것. 생각해보면 언어가 통했다고 해도 이 이상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하루종일 틈날 때마다 배운 중국어 단어 '판디엔(음식점)'을 마지막엔 구글 번역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상하이 음식점을 알아두었다고 했다. 이게 그녀가 여행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비행기나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이동할 때면 택시를 이용한다. 목적지 주소만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식사도 중식당엘 가면 걱정 없이 원하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이번엔 다른 여행을 제안했다. "스페인에 왔으니 스페인식으로 먹어야지. 여긴 타파스 투어가 유명해"라고 말하며 그녀를 전날 갔던 타파스 집으로 이끌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하면 타파스가 공짜로 딸려 나오는 곳. 메뉴판을 받아 든 그녀는 약간 긴장됐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휴대전화를 꺼냈다. 구글 번역(맞나?)을 켜 메뉴판에 갖다 대자 중국어가 오버랩됐다. 그러더니 자신 있게 메뉴를 골랐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내가 영어를 못해서 미안해. 중국에 돌아가면 꼭 영어 공부할 거야'라고 말했다. 맥락은 이해했지만 '영어를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이상하기만 했다. 한국어를 못해서 혹은 내가 중국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왜 영어를 못해서 서로에게 미안해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어차피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인데 나는 그녀에게 한국말이 아니라 계속 영어로 얘길했다. 이것도 이상하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청도에 놀러오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언젠가 청도에 갈 수있기를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서 더듬거리더라도 중국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름다움



@오묘함



@시원함



@지침(알함브라에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라 그냥 지나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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