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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우리는 다정한 반이 되기로 했다.

-개학 첫날 기록

by taasha

경력이 쌓여도, 개학은 교사에게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때론 불안을 안겨준다.

처음이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


<첫날을 지배하는 자, 1년을 지배한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

6학년, 초등학교 마지막 해. 나는 단순히 한 해를 함께 보내는 선생님이 아니라, 아이들이 중학교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초등학교의 어른이었다. 1년 뒤, 그들이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첫날, 나는 친절해야 했고, 동시에 단호해야 했다.

친절하면서도 단호하라니. 따뜻한 프라푸치노도 아니고, 참 어려운 말이다. 몇 년째 그렇게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 해는 너무 단호해서 아이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또 어느 해는 너무 친절해서 선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번뇌에 빠지곤 했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강하지만 따뜻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우리 반은 어떤 반이 될까?"

첫날, 나는 아이들에게 **"다친함 반"**이란 이름을 소개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진 반, 그리고 함께하는 반. 이 반에서의 시간들이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성장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이름이었다.

하지만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다정하고 친절해야 할까?"
"다정함과 친절함은 어떤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하나둘씩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친절하면 친구들이 더 기분이 좋아요!"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친절하면 반에서 싸울 일이 줄어들 것 같아요."

그 말들을 들으며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친절한 행동과 다정한 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

우리는 함께 이야기했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친구의 하루를 바꿀 수 있다는 것, 배려하는 행동이 교실을 더 따뜻한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

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친절하기 위해선 나를 지킬 힘이 필요해."
"친절한 사람이 된다는 건, 나의 선을 지킬 힘을 갖는다는 거야. 나에게 먼저 친절하자."


사춘기 때부터, 아니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따라다닌 고민이었다.


"착하면 호구 된다."
"친절하면 우습게 본다."


이런 말들 속에서, 친절함을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조차 확신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아마도 가면성 우울증에 가까웠을 것이다.
밖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에 최선을 다해 공감했고, 친절하려 애썼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이유 모를 불안과 가슴 떨림에 모든 것을 회피하곤 했다. 때로는 우울함에 깊이 침잠하기도 했다.

그러다 김주환 교수님의 강의에서 해답을 찾았다.
"친절은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왜 항상 남을 먼저 배려했을까? 왜 친절을 ‘나를 희생하는 일’로만 여겼을까?
이제야 깨닫는다. 자존감은 남이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비롯된다.

따뜻하고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먼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 온기가 내면을 채울 때,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선'을 이야기했다. 예전이었다면 말하기 주저했을 내용이었다.

"나는 선생님 책상을 개인 공간으로 생각해. 선생님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거나 의자에 앉는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다정하고 친절한 것'이란, 무조건 참거나 아무에게나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선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기 시작한 듯했다.



학급을 운영하는 일, 권위와 친절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고민이 많다.

나는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하지만 선을 지키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단호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을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그 존중이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을 주고 싶다. 하지만 그 안전함 속에서도 책임감을 가르쳐야 한다.

첫날, 나는 그 밸런스를 잡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리고 하나 확신했다.

"나는 친절하지만, 그게 만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엔 단호해질 수 있다."
이 메시지를 첫날에 각인시켜야 했다.


"우리 반은 이런 반이 될 거야."

✔ 존재를 소중하게.
✔ 도전은 용감하게.
✔ 규칙은 모두를 위한 것.

마지막으로 나는 말했다.
"이 반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야. 이곳에서의 경험이 너희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야."
"나는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첫날, 나는 다친함 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첫날을 마치고, 나는 교실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오늘 아이들에게 친절하지만 단호한 선생님이라는 인상을 남겼을까?
아이들이 반에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고민해보게 했을까?
1년 동안 함께 성장할 준비가 되었을까?

이 모든 고민 속에서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은 좋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같은 고민을 하면서 교실 문을 열 것이다.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준비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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