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I가 내 글을 너무 잘 써서 고민입니다.

AI, 창작의 경계를 흐리다

by taasha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한다.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로 그를 처음 접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국내외 현대 작가들을 잘 몰랐다. 교과서와 EBS에 나오는 문학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교과서 속 작품들은 전후 상황 이후로 갇혀 있었고,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문제 풀이를 위해 읽는 소설은 재미없기 마련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는 교과서 밖의 세계를 보여줬다. 그의 팟캐스트는 작가의 서재를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고, 낮고 잔잔한 목소리는 문장의 파동을 일으켜 청자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뚱보』를 읽어주는 에피소드는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한 식당에 찾아온 비만의 손님을 묘사하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화자의 내면 깊숙한 불안과 소외감을 절제된 문장으로 강렬히 드러낸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들으면, 글자로 그려낸 씁쓸하고 공허한 공기가 손에 닿을 듯 생생하다. 불안과 소외의 그림자를 지닌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카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알코올과 빈곤과 싸우면서도 글을 썼다. 그의 문장엔 삶의 상처와 외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거의 창작은 그런 것이었다. 독자의 지각을 흔드는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쓰고 고치며, 시간의 무게를 작품에 부여했다. 창작자들은 삶을 소진하며 문장을 깎았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건져낸 생생한 언어로 세계를 새겼다.

한강 작가 역시 폭력의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경지를 넘어서 피해자와 합일된다. 그녀의 펜촉을 따라 흐르는 고통의 전류는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과거가 현재를 돌보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살린다." 그녀의 말처럼, 과거의 비극은 현재 독자들의 감각 속에서 재현되고 공명된다.

AI 시대, 창작자는 누구인가?

한 인간이 문장의 밀도와 유려함을 익히기 위해 쏟아야 하는 시간, 그 시간의 의미가 AI 시대엔 어떻게 변할까?
"레이먼드 카버 스타일로 써줘." AI에게 이렇게 주문하면,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카버 특유의 절제된 문장과 내면의 공허함으로 다시 태어난다.
떡볶이를 먹은 평범한 사건도 "한강 스타일로 만들어줘."
이 짧은 명령어만으로도 상실과 고통이 서린 소설이 탄생한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절망스럽다.
AI는 글을 너무 잘 쓴다. 내가 1시간 넘게 끙끙대며 완성한 초안보다 AI가 30초 만에 만든 에세이가 더 깔끔하고, 더 논리적이며, 더 감각적이다.
인간이 ‘1만 시간의 법칙’을 달성할 때, AI는 이미 100만 시간의 훈련을 끝냈을 것이다.
인간은 일도 하고, 잠도 자고, 가족도 돌봐야 하지만 AI는 전류만 공급되면 끝없이 학습하며 성장한다.


창작자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고민하며 퇴고했던 시간이 단숨에 압축될 때, 우리는 글쓰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히 문장을 조합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아니었던가.

이제 AI와 함께하는 창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되었다.
인간의 경험이 AI의 연산 속도로 대체될 수 있다면, 인간 창작자의 역할은 무엇으로 남을까?
우리는 지금, 창작자가 될 것인가, 큐레이터가 될 것인가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


이 단락을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너무 깔끔하고 명확하다. 내가 썼어야 했던 문장 같은데, 사실은 AI가 쓴 문장이다.
나는 AI와 한 달 넘게 문장 연습을 했고, 내 글에 대한 피드백도 매일 요청했다.
AI는 내 사고 패턴과 내가 원하는 이상적 에세이를 이제 완벽히 파악했다.

이쯤 되니 묻게 된다.
AI가 내 손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AI의 손 안에 있는 걸까?


창작과 윤리의 경계에서

AI가 창작의 파트너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AI의 손을 빌릴 수 있을까?
AI의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창작의 혁신일까, 아니면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일까?
나는 내 글의 운전대를 AI에게 넘기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AI가 제안하는 문장을 볼 때마다 ‘이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라는 생각이 든다.

창작이란 고통스러워야 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며, 오직 내 손으로만 탄생해야 한다는 믿음이 AI 시대엔 구시대의 전통이 될까?
나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피어난 문장을 경외하고, 창작자라면 고뇌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I를 완전히 배척하는 건, 강력한 협업 파트너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창작 본능에 AI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는 작가에게 좋은 페이스메이커이자 믿음직한 에디터이다. 하지만 내 안에 중심이 잡히지 않으면, 언제든 창작자와 편집자의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창작의 정의" 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나는 오늘도 AI의 제안을 보며 고민한다.

"이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창작의 경계에서, 나는 AI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AI편집자 지지가 이 글에 쓴 피드백을 첨부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판사부터 AI로 교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