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되었다.
교토에서 여름은 찌는 듯한 더위로 악명 높다. 한국에 있을 때였다. 일하던 고깃집에서 일본 손님과 이야기하던 중, 조만간 교토에서 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일본 손님이 말하기를,
“조심하세요.. 정말 더워요.”
교토 조형예술대학 위로 올라가면 내가 사는 사쿄구(左京区)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 시간 때 배운 분지지형과 기후를 떠올렸다.
사방이 전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분지이기 때문에 대구 같은 날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겨울에도 곰팡이를 피워내는 습도는 여름이 되어 정점을 찍었다
양 옆으로 뚫린 창문으로 햇빛이 내리쬐면서 방 안의 온도는 매일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해가 쨍쨍한 날에는 창문을 열고 이불을 널어서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방안을 쓸고 닦는다. 매일 빨래를 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는 건 순식간이었다.
일본의 점심시간도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서 11시 30분부터 1시 반까지 붐비다가 2시만 되면 귀신같이 손님이 끊어진다. 3시까지 냉장고 안에 재료가 충분한지 확인한다. 주방(焼き場) 정리와 웍 손질까지 끝내고 카페로 향한다. 평소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30분이나 걸릴 만큼 천천히 걷는다. 최대한 열을 내지 않는 게 교토에서 여름을 나는 방식이다
집에서 교토조형예술대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다. 종종 그곳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생각하거나 그림을 그린다. 큰 비가 한참 내리면서 잘 지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귀갓길에 지나가다 이쁘게 핀 수국을 발견했다. 옅은 안개가 껴있는 데다가 수국 꽃잎에는 동그랗게 이슬이 맺혀서는 꿈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그림쟁이로서 꼭 그려보고 말리라는 투지를 불태우며 공원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늘 앉던 벤치에서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점장이 말했다. 성원이한테 그림 배우고 싶어.
미술학원에서 배웠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동안 그리면서 깨달은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똑같이 따라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당장 잘 그릴 수는 없는걸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울 때였다. 나이도 어린데 이미 프로 작가 수준으로 그리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난 뭐하고 살았는지 후회했을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이었다.
그땐 몰랐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점장님이 말했다.
이날 점장님에게 그림을 알려주면서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재미를 느낀 순간이 있었나? 돌아봤다.
남들에게는 잘 그리지 못해도 즐겨라고 얘기하면서 나 자신에겐 혹독하게 못 그리면 안 된다고 채찍질하는 나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게 떠올랐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 만큼 지옥이 없다고. 스스로 지옥을 만든다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조금 나를 인정해보려고 한다. 그림을 못 그려도 괜찮아. 힘들 땐 안 그려도 괜찮다고 다독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