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눈치로 통역된다

세 언어가 교차하는 파리의 식탁 위에서

by 찰나 지나

우리 집 식탁은 매일 저녁 기묘한 언어의 질서로 유지된다. 파리 태생의 일본인 남편은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일본인이지만, 속은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남자는 한국어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된다.

우리 부부의 공용어는 일본어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품에 안고 "우리 왕자님, 오늘 유치원에서 잘 놀았어?"라며 한국어로 속삭일 때면, 남편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흔들린다. 분명 제집 식탁인데,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대화에서 혼자만 소외되는 찰나의 정적. 그 공백 속에서 남편은 잠시 길을 잃는다.


"아빠, 물!" 아들이 선택한 첫 번째 주파수


사실 우리 집의 언어 권력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3개 국어가 각축전을 벌이는 환경 속에서, 세 살 아들이 가장 먼저 움켜쥔 ‘첫 번째 언어’는 뜻밖에도 엄마의 모국어인 한국어였다. 아이가 무언가 간절히 원할 때 터져 나오는 본능적인 외침들은 모두 한국어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아빠는, 눈앞에서 아들이 애타게 건네는 단어들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아빠, 물!” 아들이 작은 손가락으로 컵을 가리키며 한국어로 외칠 때, 남편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구원투수처럼 쳐다보며 묻는다. “지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응?”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말을 건네는데 그 뜻을 몰라 달싹이는 아내의 입술만 바라봐야 하는 아빠의 마음. 그건 단순히 언어 장벽의 문제를 넘어, 아들과의 세계에서 잠시 추방당한 이방인의 슬픔 같은 것이었으리라.


"미즈(みず)" 아빠라는 대륙을 향한 항해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아들은 생각보다 훨씬 영특하고 다정했다. 자신이 아무리 간절하게 한국어로 외쳐도 아빠라는 수신기에 닿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들은 아빠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면 슬그머니 언어의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에게 "물 줘"라고 하던 아이가, 아빠에게는 "미즈(みず)!"라고 고쳐 말하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의 그 묘한 전율이란. 아들은 벌써 아빠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주파수를 조정하고 있었다. 엄마와만 공유하던 밀도 높은 한국어의 세계를 넘어, '아빠'라는 새로운 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셈이다.


"말은 몰라도 다 알지" 사랑이라는 공용어


아빠 또한 지지 않았다. 한국어를 못한다던 남편은 어느새 ‘생존형 한국어 눈치’를 마스터했다. 이제는 아이가 단어 끝에 붙이는 미묘한 억양과 절박한 손짓만 보고도 “아, 이거 달라는 거지?” 하며 정확히 물건을 집어 든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통역이 된다. 프랑스어와 일본어, 한국어가 뒤섞인 이 소란스러운 식탁 위에서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는 법을 배운다.

아이가 자라 그 여권에 어느 나라 이름이 적히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낼 목소리가 어느 나라 말인가보다, 그 말속에 얼마나 깊은 온기를 담은 '사람'으로 자라날까 하는 점이다. 세 언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 집에서, 우리는 국적이라는 틀을 넘어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읽어내는 법을 익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