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우울함을 씻어내 주는 아이의 한마디
파리의 겨울은 낭만보다 인내에 가깝다. 아침을 깨우는 건 눈부신 햇살이 아니라, 창틀을 적시는 눅눅한 습기와 낮게 가라앉은 회색 구름이다. 며칠째 이어지는 우중충한 날씨는 내 기분마저 잿빛으로 물들인다.
커피 한 잔을 내려도 가시지 않는 이 우울함 속에서, 나는 세 살 아들과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오늘도 날씨가 참 안 좋네, 그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문에 코를 붙이고 있던 아들이 나를 돌아보며 천진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이를 쳐다보며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지메'라니.
보통은 괴롭힘이나 따돌림이라는 무거운 사회적 의미로 쓰이는 그 단어가 아이의 입에서 이렇게 생생한 단어로 재탄생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너무나 맑고 진지했다. 그저 자기 자리를 뺏긴 햇님이 걱정되는 듯한, 아주 순수하고 호기심 어린 얼굴. 아이의 그 표현력에 놀라 웃다 보니 마음을 잠식하던 우울함이 어느덧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
사실 아이가 이 단어를 쓰게 된 데에는 우리 집만의 사정이 있다.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함께하는 식탁에서 세 식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본어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나 역시 아이에게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다. 아이가 장난감을 고집하며 친구를 밀어낼 때면 나도 모르게 "친구를 너무 이지메(밀어내기)하면 안 돼"라며 두 언어를 섞어 다독이곤 했다. 엄마의 서툰 이중언어 속에서 아이는 그 단어를 '남의 자리를 뺏거나 밀어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직관적인 형용사로 흡수했고, 그것은 거대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기발한 비유가 되어 돌아왔다.
다국어가 섞인 환경 속에서 아이는 단어의 무게보다 그 단어가 가진 '이미지'를 먼저 흡수한다. 한국어의 '가렸다', 프랑스어의 '회색(gris)', 그리고 일본어의 '이지메'. 아들은 이 세 가지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논리를 쌓아가는 중이다.
"구름이 햇님을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가 햇님을 응원해 주면 되지 않을까?"
내 제안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창문에 대고 "햇님, 힘내!"라고 외쳤다.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는 여전했지만, 우리 집 거실만큼은 아이의 다정한 목소리로 햇살이 비치는 듯했다.
세 언어가 교차하는 식탁 위에서, 오늘도 나는 아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배운다. 비록 구름이 햇님을 가릴지언정, 그 너머엔 언제나 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