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도시락#1: 손주 도시락은 며느리 몫

“아이 점심은 네가 챙겨 주겠니?”

by 찰나 지나

바캉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워킹맘으로 살아남기


프랑스의 학교 종소리는 6주마다 멈춘다.

6주 수업 후 2주간의 방학이 이어지는 시스템 덕분에, 일 년에 무려 다섯 번의 바캉스가 돌아온다. 아이들에게는 천국 같은 소식이지만, 워킹맘에게는 2주마다 거대한 숙제가 배달되는 기분이다.

다행히 프랑스에는 부모들의 일과 삶을 지탱해 주는 ‘상트르 드 루아지르(Centre de loisirs, 방과 후 레저 센터)’라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학교 수업은 없어도 아이들은 이곳에서 친구들과 온종일 뛰어놀 수 있고, 덕분에 나도 책상 앞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2주 내내 센터만 보낼 수는 없는 법.

우리 집에는 바캉스 기간 중 일주일에 하루, 아이가 '마미(Mamie)'와 '파피(Papy)'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무언의 규칙이 있다. 조부모와 손주가 유대감을 쌓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지친 워킹맘에게 주어지는 단비 같은 휴식이다.

여느 때처럼 아이를 맡기기로 한 전 날, 시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지나야, 아이 점심 도시락은 네가 챙겨서 보내주겠니?


한국의 ‘정’과 프랑스의 ‘합리주의’가 부딪힐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문장은 내 마음속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에 수십 년을 사셨어도 뿌리는 철저히 일본인인 시부모님.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 정서(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와 프랑스의 ‘철저한 자기 영역 존중’이 결합된 결과일까?

한국에선 자고로 손주나 자식이 온다고 하면, 밥 안 굶기려고 항상 새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갓 지은 따뜻한 밥에 정성 가득 담긴 반찬들. 그 풍경이 나에겐 정석이었다.

그런데 손주의 한 끼를 차려주는 즐거움보다 자신의 루틴을 지키고 며느리에게 '각자의 몫'을 명확히 하는 그 합리적인 태도가, 한국 며느리인 나에게는 서운함과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 프라이팬을 잡고 얇게 편 달걀물을 정성스레 돌돌 말아 올린다. 다시 어제의 그 서운함이 삐죽 고개를 내밀려는 순간, 3년 전 기억이 떠오르며 서운함은 이내 가라앉는다.


도시락에 담긴 100일의 기억

3년 전.

계절이 바뀌고 제법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마흔이 넘어 자연분만으로 3.2kg의 아이를 낳았다. 출혈이 심해 결국 수혈까지 받아야 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온 근육 마디마디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 진통제로 버티던 하루하루.

산후조리 개념이 없는 프랑스에서 일주일만 지나도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유럽 여성들과 달리, 나는 백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시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평소 그렇게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분이, 내 출산 후 100일만큼은 최선을 다해 도시락을 날라 주신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엇이 그분의 단단한 개인주의를 무너뜨리고 100일간의 기적을 만들었던 걸까?

그 답은 아마도 결혼 전 내 부모님과 나누었던 그 약속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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