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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Apr 21. 2018

테러가 있었던 날 1

  2013년 9월 21일

토요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밀린 빨래를 1시간 정도 공을 들여서 손으로 빨아 파란 하늘 아래 널면서 뿌듯해하고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풀면서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다니던 닭과 병아리들을 쳐다보고 있던 그 때,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의 아줌마가 집안에서 나를 불렀다. 얼른 들어와서 TV를 좀 보라고, 웨스트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웨스트게이트(Westgate)는 나이로비에서 손꼽히는 고급 쇼핑몰이었다. 그때 내가 머무르고 있던 곳에서 버스를 두 번은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은 잡고 가야 하는 쇼핑몰이었는데, 연구활동 초기에 딱히 갈 일은 없던 동네인 웨스트란즈(Westlands)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나이로비의 서쪽인 웨스트란즈에는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인들을 위한 거주지와 시설들이 많았고, 동쪽의 이스트란즈(Eastlands)에는 반대로 케냐의 선주민들이 격리된 상태로 살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낮아지는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서쪽은 배수도 잘되고 주변 환경이 좋았지만, 동쪽은 항상 홍수에 시달리고 척박한 주거환경에 신음해야 했다. 서쪽에 있는 '지배자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 동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현대에도 웨스트란즈에는 웨스트게이트 같은 쇼핑몰이 들어섰고, 많은 외교관이나 주재원들 및 부유층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 웨스트게이트에는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내가 빨래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와 현장의 상황을 TV로 보고 있을 때는 쇼핑몰에 강도가 들었다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함께 TV를 보던 사람들과 나는 이 상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토요일 대낮에 저런 번화가에 있는 쇼핑몰에 강도질을 하러 들어가는 것은 강도가 판단을 잘못한 것인 아니겠냐는 대화를 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뉴스 보도의 내용은 급변했다. 쇼핑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강도가 아니라 테러였다.


사실 테러라고 알려졌을 때도 뉴스는 정확한 사실 전달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몇 명이 사망했는지, 대체 누구의 소행인지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테러라고 해도 설마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번화한 시내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어떻게든 진압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좀 걱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페이스북과 전화로 연락을 해서 혹시 뉴스에서 나이로비 소식을 듣더라도 걱정을 하지 말라고, 나는 무사하고 거기 근처에도 안갔다고 말했다. 아니 근처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건 3년 전에 처음 나이로비에 왔을 때라고 약간은 농담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그때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케냐 역사상 손꼽히는 사건으로 기억될 만큼 큰 인명피해와 사회적인 충격을 남겼다. 총 67명이 사망했고, 175명이 부상당했으며, 외국인들에게 방문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알려졌던 나이로비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나이로비라는 도시의 생활지도를 바꿔버릴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남겼고, 케냐가 국제 테러사에 또 한번 전면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에도 시내 중심가에 있었던 미국 대사관을 노린 큰 테러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가 있었다).


그날은 2013년 9월 21일이었다. 1년간의 본격적인 현장연구를 위해 다시 케냐를 찾은 후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를 연구조교로 고용했던 미국의 한 교수로부터 (다행히 지도교수는 아니었다) 당장 나이로비를 떠나라는 메일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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