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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Apr 22. 2018

테러가 있었던 날 2

테러와 불평등

당장 나이로비를 떠나라는 그 교수님의 메일이 고맙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타지에서 그런 상황을 겪고 있고, 한 때는 연구조교였던 학생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당장 떠나라는 그런 말에는 마음이 좀 상했다. 사실 그건 그 교수님이 인류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 메일이 도착한 직후에 온 인류학자 교수님의 이메일에는 떠나라는 말은 없었고, 내 생각에 그런 고급 쇼핑몰에 니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조심하라는 정도의 메일이었다.


교수님들의 메일에 답장을 하면서 내가 정말 나이로비를 떠나야 하는 것인데 마음을 너무 느긋하게 먹고 있는 것인가 한 번 곰곰히 생각해봤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이로비는 당장 짐을 싸야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무슨 내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외교관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철수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 조차도 내 연구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시생활의 지도가 바뀌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때마침 지인을 통하여 모 신문잡지의 기자를 소개받았고 그 잡지에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외국인 관찰자로서 고민하고 또 글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당시 케냐는 동북부에 이웃하고 있던 나라 소말리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합법적인 정부가 확립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 일 때문에 반군단체인 알샤밥(Al-Shabaab)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아니, 알샤밥의 입장에서는 소말리아 내에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케냐의 존재가 어마어마한 걸림돌이였고, 어떤면에서는 국토가 케냐군대에 의해서 침범당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케냐동북부 지역에 크고 작은 폭탄테러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중이었고, 나이로비 동쪽의 몇몇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안전을 철썩같이 믿고 지내던 부유하고 번화한 지역의 한복판에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하여 서구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케냐에서 있었던 기존테러의 접근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행위였다.


최근 유럽에서 있었던 테러사례들에도 보여주듯 테러를 하는 집단들은 서구인들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것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음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면이 있는 듯도 했다. 웨스트게이트도 그런 사례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일으켰던 테러에도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쇼핑몰 테러는 알샤밥의 입지를 단숨에 뉴스 전면으로 등장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테러도 슬펐지만 그런 불평등도 참 씁쓸했다. 나중에 내가 케냐를 떠난 후에는 100명이 넘는 케냐의 대학생들이 알샤밥의 요원들에게 총살당한 테러가 국경에 가까운 Garissa라는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 사건은 그때도 지금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인명피해의 숫자로 테러의 중요도를 따질 생각은 없지만 그 심각성에 비해서 이 사건이 별로 알려지지 못한 배경에 서구인이 희생당하지 않았고 나이로비라는 국제적인 도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있음을 아예 부정하기도 어렵다.


테러는 아니었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2014년 전세계를 강타한 서아프리카 에볼라 사태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였고, 에볼라가 발생한 기니, 라이베리아, 그리고 시에라리온이 있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비행기로 6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일단 같은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보니 케냐에서는 에볼라 뉴스가 이미 첫 환자가 발생했던 2013년 12월 부터 알려지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이 무서운 전염병이 기니에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으로 퍼지면서 한참 기승을 부리는 동안에도 서구의 뉴스에는 제대로 보도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급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미국 출신의 의료봉사단체 미국인 활동가가 서아프리카인이 아닌 사람 중에는 최초로 감염이 되었던 순간이다.


그건 정말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뉴스흐름의 급변이었다. 벌써 반년 이상 치사율이 90%에 달하는 에볼라가 창궐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전세계의 시선이 순식간에 서아프리카로 쏠리다니. 덕분에 한국뉴스에도 에볼라가 대서특필되었고 나는 이메일과 카톡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기도 했다. 그 모든 변화를 피부로 느끼면서 흥미롭다는 생각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웨스트게이트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은 그렇게 특정한 인명의 피해를 인지할 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은 평등하다는 책속의 논리는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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