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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May 20. 2018

에볼라의 기억

얼마 전에 민주콩고에 에볼라가 다시 발생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사실 민주콩고가 에볼라를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몇 번의 사례를 겪었고, 대유행으로 가는 것을 막은 전례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3국에서 1년 이상을 끌면서 이어진 대유행의 사태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국제적인 시선이 다른 때와 달리 좀 더 예민하다는 느낌도 든다.


나는 에볼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아주 공개적인 곳에 그 기억을 공유하기 까지 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병보다 무서운 것이 그 병에 대한 공포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인데, 오늘 오랜만에 그 글을 다시 꺼내서 읽으니, 역시 부끄럽다. 유행병을 접할 때 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군분투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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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보다 먼저 도착하는 공포에 대하여 - 나의 에볼라 체험기


같은 학교에서 보건 관련 박사 학위를 받은 한 동료가 서아프리카 기니로 에볼라 관련 업무를 맡고 떠난다. 용감한 그녀의 결정에 응원을 보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메르스 관련 뉴스를 읽으면서 케냐에서 내가 어떻게 에볼라를 겪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났다. 문두에 미리 밝히지만 나는 에볼라에 걸린 적이 없고 또 동아프리카 케냐에서는 에볼라 사례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 내가 에볼라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실체로서의 병이 아니라 공포로서의 병을 겪었다.

한국과 미국을 통해 에볼라를 느끼다

처음 에볼라 소식을 접했던 것은 2014년 1월의 어느 날 읽은 케냐의 유력 일간지의 국제면에서였다. 기니에 에볼라가 발생했다는 간단한 뉴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종종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는 했지만, 케냐는 비행기로도 6시간은 걸리는 멀리 떨어진 동아프리카에 있으니 에볼라의 영향을 느끼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케냐 사람들은 에볼라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에볼라보다는 종종 터지는 소말리아 무장단체 알샤바브의 테러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과 윌리엄 루토 부통령의 국제사법재판소 기소 상황 등이 더 화제였다.

케냐에서 에볼라의 영향을 처음으로 크게 느꼈던 것은 공교롭게도 한국과 미국을 통해서였다. 7월에 수도 나이로비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방에서 열흘 정도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로 지내다가 나왔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인터넷과 SNS를 열어보니 한국과 미국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온통 에볼라에 예민해진 메시지를 남겨둔 상태였다. 의료봉사 중이었던 미국인 의사와 간호사가 감염된 이후에야 국제적인 보도가 활발해졌고, 한국 뉴스에서도 관련 보도가 증가했던 모양이었다. 치사율 90%가 넘는 이 무시무시한 병이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사하게 느끼면서도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 아프리카 밖에서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모양으로 축소된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기억이 났다. 어느 순간 에볼라는 아프리카와 동의어가 된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착찹했다. 그리고 나는 이 병에 대해 근거 없이 동요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합리적이리라고 자신했다.

에볼라가 내 앞에 나타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볼라가 내 앞에 나타났다.


우연히 어떤 공공장소에서 숙식을 하던 중, 한 기독교 소수 종파의 지도자분이 있었다. 그 쪽 종파의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고, 또 이분 역시 어떤 다른 나라에서 오셨던 분이었기에 호기심에 쾌히 식사시간에 동석을 수락하고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분은 갑자기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발병 국가들에 있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원을 짓는 문제를 의논하고 돌아왔고, 또 갈 계획이 있는데 함께 가겠냐”며 종교인도 아닌 나에게 동행까지 제안하셨다. 그런데 동행이고 뭐고 나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합리적인 사고가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방금 했던 악수에서부터 함께하고 있는 조그마한 식탁까지 모든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식사는 끝났고, 또 동석했던 분과도 헤어졌지만 나는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 공포를 실감해야 했다. 한국에서 아무리 걱정이 빗발쳐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지낸다고 자신했던 자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한순간에 여러 가지를 함께 떠올리는 것을 그때 경험했던 것 같다. 나는 에볼라라는 병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고, 또 내가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병을 옮길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종교 지도자분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급박함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홀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 작성하고 있었고, 게다가 몸이 정말 아프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게 바로 병보다도 먼저 도착하는 '병,' 공포의 모습이었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에볼라에 대한 사적인 조치

그날 이후 이틀 동안 미친 척 외출을 삼가하면서 나는 에볼라에 대한 글을 모조리 읽어대고 있었다. 분명 몸은 말짱했지만 마음의 동요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케냐에 있었고, 케냐 정부가 에볼라에 대해 딱히 예민한 방역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공포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존재감에 압도된 나머지 불안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내가 의존할 수 있는 공적 수단이 없다면, 사적으로 내가 찾을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나의 공포를 해부해보기 시작했다. 이 막연한 공포를 조금 덜 막연하게라도 만들어봐야겠다는 시도였다. 1) 만약 내게 에볼라가 발병할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케냐 정부가 지정한 관리처에 신고해야 한다. 2) 내게 에볼라가 발병할 가능성을 따지려면, 내가 접촉한 성직자분에게도 발병했음을 알아야 한다. 3) 그렇다면 연락처도 알 수 없는 그 성직자분의 상황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발병된다면 보도된다는 가정하에 뉴스나 쳐다보고 있어야 할까?

나는 3번의 단계에서 인터넷을 열어 해당 종파의 동아프리카 지부 웹사이트를 검색했다. 처음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언정 그 쪽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그분과의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종파의 웹사이트를 열어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중에 이 단체에서 최근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뉴스를 발견했고, 내가 찾던 성직자의 행적과 입출국 날짜를 찾아내는 탐정(?) 활동을 벌였다. 내가 그분과 동석하여 식사를 했던 날짜는 그분이 서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날짜에서 에볼라의 최대 잠복기를 훌쩍 넘긴 시점이었다. 어쩌면 진작부터 이분 역시 케냐로 돌아와서 잠복기를 감안한 이후에 외부 활동을 시작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의 정상적인 사고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한 번 더 날짜를 차분히 계산했고, 내가 이분을 통해 에볼라에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나의 병, 공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메르스를 겪는 한국을 바라보며

에볼라가 내게 왔을 때, 나는 합리적이라고 자신했던 내가 순식간에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로는 병에 대해 동요하는 사람들이나 사회를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병에 대한 공포 앞에서 망상과 불안에 면역되지 않는 인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감히 누군가에게 동요하지 말라, 침착해라,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병과 병에 대한 공포는 어찌 보면 서로 '다른' 문제이다. 병에 걸렸다면 최선의 치료와 약을 쓰는 방법을 찾겠지만 병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추상적인 단계에서 현실적인 단계로 끌어내려 생각할 수 있는 정보와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 정보나 근거가 불확실하고 부재한 상황에서 사회와 개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낙타를 접촉하지 말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올렸던 본인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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