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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Mar 02. 2018

탈 것과 빈곤

작은 버스를 타는 것도 즐거웠던 그 아이들을 추억하며

어떤 행사에 참여했다.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과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도보 캠페인이었다. 그 행사가 끝나고 한 20인승 정도 되려나 싶은, 주최 측의 작은 버스에 50명도 넘는 아이들과 성인들이 미어터지도록 탑승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버스 조차도 탈 수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또 날은 어두워지는데 세 시간을 걸어서 온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면서 필사적으로 올라탔다. 차비는 1원도 없는 미치도록 가난한 동네들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올라타는데 버스는 출발도 전에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건 정말로 정말로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2003년 교통부 장관 미추키는 이런 정원초과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따로 만들어야 했지만 여전히 정원초과로 나는 사고가 드문 것은 아니었다. 사고도 문제였지만 마르고 가냘픈 아이들이 냉방은커녕 창문도 잘 열리지 않을 버스에서 교통체증과 더운 날씨 때문에 질식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 때, 내 수중에는 천 오백 실링(약 2만 원)이 있었다. 나는 마타투 차장이 아무리 비싸게 쳐도 일인당 백 실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그리고 출발하려는 버스 앞으로 달려가서 자주 찾아가던 한 동네의 몸집이 큰(그래 봐야 키만 큰) 아이들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외쳤다.  


그 아이들은 종이처럼 구겨진 모양새로 버스에서 내렸다. 어떤 아이들은 버스에 타지 못한 것 때문에 불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약간 '헐렁해진' 버스가 떠나는 것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내가 마타투를 태워주겠다고 안심을 시켰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아이들이 다니는 주일학교 수사님들과의 인연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우연이 묘하게 다행스러웠다.


아이들을 이끌고 정류장으로 걸었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차비 흥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차장들은 아이들을 태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외국인인 나'를 이용해야 했다. 또 어떻게든 교과서가 아닌 거리에서 쓰는 키스와힐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십여 명의 차장들과 마캉가들(호객꾼들)이 승객을 끌어모으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정류장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띵했다.


옆에서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돈을 내고 마타투를 탄다'는 것에 신이 난 아이들이 "우리 니싼(14인승; 한국의 봉고차와 같은 차량) 탈거예요? 버스(33인승) 탈거예요?"라고 물어서 마음이 복잡했다. 어떻게든 돈을 맞추기 위해서는 니싼을 타야 할 것 같았는데,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싶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돈이 있긴 있는데, 많이 없어서 우리 니싼을 타야겠다"라고 말하니 아이들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아이들에게 잠시 구석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그나마 노후가 덜 된 듯한 니싼의 차장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안은 비어있었고, 우리가 모두 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차장은 내가 이 아이들 모두의 차비를 낸다는 것을 흔쾌히 믿었고, 약간은 운이 따르는 장사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중에 내게 이들을 하느님이 보냈다는 생각--수입을 올려줬기 때문에--을 했다고 말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자 모두 우르르 뛰어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작은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무릎에 앉아서 마타투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내게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차장이 부르는 돈을 과감하게 깎으면서 흥정을 했고 원하는 금액을 얻었다. 그리고 차장에게 아이들이 어디에 사는 아이들인지에 대한 것을 살짝 알려주면서 일반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그 동네의 입구까지 가는 것에도 합의를 했다. 땡볕에 자신들의 교육과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캠페인 때문에 몇 시간을 걸은 아이들을 또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버스가 아닌 니싼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신이 났다. 창밖을 보면서 나이로비에 차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가녀린 몸을 내밀고 밖을 보려는 것을 말려야 했는데 그것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네에 도착했다. 나이로비에서도 유명한 부촌 안에 숨겨진 빈민촌이었다. 앞서 복잡한 버스를 타고 먼저 도착한 몇몇 아이들이 마타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온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타고 가지 못할 빈 마타투에 마치 승용차 시승이라도 하듯 올라탔다. 차는 이제 또 저녁의 수익을 채우러 급히 떠나야 했기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태워준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들을 내리게 했다.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300원 정도 내면 타는 낡은 마타투인데 서민들의 발인 이 교통수단 조차도 어떤 아이들에게는 사치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차장과 기사는 나에게 "이 부촌 안에 저런 동네가 있는 줄 몰랐다"라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솔직히, 수입을 올려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 또 빈차를 채워야 하나 피곤했는데 우리가 나타나서 하느님이 보낸 줄 알았다고 했다. 혹시 또 단체 차량이 필요하면 꼭 전화를 하라고 자신의 번호를 남기는 차장에게는 "내가 곧 나이로비를 떠날 예정이라 아마 그럴 일이 없을 건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번호를 받아서 넣었다.


차는 내가 다른 마타투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있는 곳에 멈췄다. 우리는 서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조금 더 예의를 갖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가 내리자마자 차장은 또 고함을 치면서 승객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다시 빈 차를 채워서 시내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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