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스와힐리어 외에도 건드려 본 언어가 많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 과목이었던 독어, 프랑코폰 서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싶은 맘에 어설프게 배웠으나 기초도 부족한 불어, 그리고 드라마로 배운 일어와 인사와 소개만 가능한 아랍어.
이전에 썼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언어라는 것은 꼭 마스터하기 위해 배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언어의 한 단어만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언어를 주로 쓰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배운다. 나는 그게 그렇게 좋았다.
10여 년 전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시간이 남아서 수어를 배웠다 (그때는 수화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한 동호회 사람들과 어울려 농인 선생님들께 참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숫자를 익힐 때가 가장 어려웠는데,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번호판이나 버스 번호를 열심히 반복하면서 시험 준비를 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우연치고는 또 참 잊을 수가 없는 일을 하나 겪었다.
한창 한글 지문자(손가락으로 표시하는 한글)를 외우던 때였는데 연습 삼아 지하철역들을 반복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이대, 신촌, 홍대입구, 합정... 이런 식으로. 그날은 아마도 합정에 살던 지인을 만나고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승강장의 나무 벤치에 앉아 벽에 붙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연습하던 중이었다.
그때 건너편 승강장에서 나를 향에 빠른 속도의 수어로 말을 건네는 두 신사 분들이 보였다. 활짝 웃는 얼굴로 내게 열심히 말을 걸고 계셨다. 나는 그분들이 농인 또는 수어가 수준급인 청인으로 짐작하면서도 나의 미천한 수어 능력 때문에 민망하여 그저 부끄러운 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때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열차에 올라타서 창문을 통해 그분들과 눈을 맞췄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겠기에 그저 아직은 잘 못한다고 입모양만 반복했다. 농인들에게 입모양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사실 예의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분들은 떠나는 열차의 창문 너머로 내게 환한 손짓으로 열심히 배우라는 격려를 보내주었다.
유학을 떠나고 수어를 다시 접할 기회가 없었다. 알고 있던 것도 다 까먹었고 이제 남은 것은 그때 지하철에서 익히던 지문자들 뿐이다. 하지만 그 이름 모를 두 신사의 표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수어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안고 사는 것은 바로 그 기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