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친구를 추억하다

안녕, 바이킹

by 심한수

8여 년의 미국 생활 중 애리조나에서 5년을 넘게 살았다. 시간에 비례하는 듯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특히 좋았던 것은 말 그대로 참 다양한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늘 헷갈려하던 90이 넘은 노인, 어른들 보다도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던 세 살배기 꼬마, 산산조각 난 고향을 뒤로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미국까지 온 수많은 국적의 난민들, 같이 운동하며 우정을 키운 70대 인생 선배들......


그리고 바이킹과 아카샤.


나는 원래 큰 개들을 늘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뭐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집이 커다란 녀석들은 왠지 두려워서 가까이 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큰 개를 많이 키우고, 이곳저곳 공공장소에서도 녀석들을 접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피해 다니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나는....... 큰 개들에 정이 많은 사람으로 돌변한 상태다. 그게 다 바이킹과 아카샤 때문이다.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던 어느 여름, 남편의 고향인 덴마크로 긴 휴가를 떠나던 친구 헤더에게 전화가 왔다. 한 달 이상 집을 비우는데 집과 개를 좀 돌봐줄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보통 미국에서는 장기간 집을 비울 때, 하우스시팅이나 도그시팅(또는 캣시팅)을 주변에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보였다. 식물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들은 적도 있었다. 주변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못하면 돈을 주고라도 집과 반려동물/식물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헤더네 식구들에게는 몇 개의 화초들과 두 마리의 대형견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바이킹과 아카샤였다.


녀석들은 독일 혈통의 바이머라너(영어로는 와이머라너)였다. 아카샤가 누나였고 바이킹은 남동생이었는데 (진짜 혈연지간은 아니고 나이가 달라서) 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견종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근대까지도 이 견종은 독일 밖으로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한 때는 귀족들에게 독점되었다고 한다.



바이킹과 아카샤를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헤더를 통해서 한두 번 본 적은 있었고 녀석들이 얼마나 큰지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이 아이들을 감당하려고 보니 어마어마하게 힘이 부쳤다. 아침마다 녀석들을 산책시키려면 내가 애들을 끌고 있는지 애들이 나를 끌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걔다가 점잖고 조용한 아카샤에 비해서 활동성이 강하고 귀염성도 많은 바이킹은 지 몸이 얼마나 큰 줄도 모르도 나한테 안겨들려고 해서 이리저리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뜻밖에도 행복이 가득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반려견을 키우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떤 날에는 나를 위로하고 또 어떤 날에는 나와 장난을 치고. 내가 아이처럼 돌보고 또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꽤나 신기했고, 인간이 아닌 동물과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녀석들을 몇 번이고 장기간 돌보면서 나는 일종의 '이모'가 된 기분으로 바이킹과 아카샤를 챙겼다. 애리조나를 떠나면서는 많은 사람 친구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 두 바이머라너들이 눈에 밟혀서 슬프기도 했다.


얼마 전, 헤더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다른 통로로 소식을 접하기 전에 먼저 꼭 얘기해주고 싶었다고. 바이킹이 세상을 떠났다고. 병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냥 주사를 놓았고 녀석은 평온하게, 또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떠났다고.


이미 10년 이상을 산 두 노견이었기에 올 것이 왔구나 싶기는 했지만, 그게 누나였던 아카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다는 것에 좀 놀라고, 또 그 왈가닥 녀석의 모습을 마음으로만 찾아볼 수 있음을 깨달으니 슬픔이 몰려왔다. 언젠가 한 번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바람이 덧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이킹이 우당탕탕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좋은 친구였고 또 좋은 개였던 바이킹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