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군을 위한 수어 프로젝트 1

P군을 만나다

by 심한수

P군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온 난민 청년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10대처럼 보였지만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6남매 중 장남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부모가 영어를 아는 P군의 여동생을 통해 전한 사연에 따르면, 장남이 청력을 잃은 이유는 말라리아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나중에 만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그건 아마도 당시에 사용되던 말라리아 약의 부작용 때문일 수도 있단다.


P군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어 난민캠프에서 자랐다. 몇몇 동생들은 그 캠프에서 태어났고, P군은 그곳의 학교에서 글자를 조금 익히고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P군의 나라에서도 캠프의 학교에서도 수어(sign language)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실 그곳은 공식적인 수어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P군은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생활했다. 형제자매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들만의 '수어'도 생겼고, 어린 남동생들과 여동생들은 P군을 너무나 좋아했다. 난민캠프의 학교에서도 P군의 곁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나와 조금 친해진 P군이 캠프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건 그의 청각장애가 우정의 장애가 되지는 않았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었다.


P군의 가족이 난민캠프에서 십수 년의 기다림 끝에 재정착 난민으로 선정되어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나는 그들을 만난 첫 봉사자였다. 나는 P군과 그의 아버지를 한 ASL(American Sign Language) 수업이 있는 단체로 안내하는 일을 맡았는데, 셋이 공통된 언어가 단 하나도 없이 그 먼 길을 어찌어찌 설명하면서 찾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P군의 부모, 그리고 그들의 나라에서 온 이웃의 다른 난민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중에 그 봉사활동을 주선하던 곳이 나의 단기 직장으로 변하면서는 그곳에 영어를 배우러 오는 P군의 어머니와 거의 매일 보고 지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P군도 종종 만났다. 그때 그 ASL수업은 단기로 끝났고 학령을 넘겨서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는 P군이 청인들(청각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영어 수업에 출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P군이 걱정되면서도 또 한편 글로라도 영어를 익히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일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동료 J가 나를 불러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P를 저대로 그냥 두면 안될 것 같아. ASL이라도 다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엄밀하게 따지면, P의 상황에 개입하는 것은 J와 내가 해야 하는 업무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분명히 개입해야 하는 대상자들이 세 명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이런 상황 즉, 난민이고 영어도 안되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청각장애 청년을 위한 방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 또는 어려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J와 의논한 뒤 2주 정도 나는 그 담당자들에게 이런저런 문의를 하면서 어떻게든 P의 상황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서로 탁구를 하듯이 일을 떠넘기는 그들에게 질려서 J와 내가 뭔가 궁리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때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2달 정도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는 갑자기 왜 진작에 P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았는지를 자책하면서 또 급한 마음에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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