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한수 Mar 15. 2018

대출의 세계에 입장하다

입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다

10년 만에 한국에 귀국한지도 이제 6개월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기분은 6일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것이 나를 반하여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곳에서 나는 잘하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


이건 해외생활을 넘어서 오랜 학교 생활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10년 전 박사 유학을 떠날 때, 나는 내가 학계에 뼈를 묻을 줄 알았고 학문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라는 순진함을 넘어, 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넓은 학계에서 나는 현실적으로 꼬리가 잘린 도마뱀과도 같았고, 뒤늦게 경험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원천징수니, 등기부등본이니...... 어디선가 들어만 봤던 것들을 상대하면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이 학교만 다닌 사람들을 무시하나. 혹시 이래서 먹물만 먹은 (인문학) 박사는 안 뽑으려고 하는 건가. 지금까지 나를 떨어뜨린 셀 수 없이 많은 직장들은 아마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도 한다.


게다가 대출 없이는 일과에 지친 내 몸 하나 누울 공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다. 월세는 왜 이렇게 비싼 건지. 그리고 대출이라니. 빚이라니. 내가 왜! 세상에 이토록 성실하게 살았는데 자발적으로 빚을 만들어야 한다니 (돈은 못 벌었으니까!).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이자를 수십 번 계산하면서도, 왜 내가 적지도 않은 나이에 대학생 때 살던 크기의 (아니 어쩌면 더 작은) 원룸으로 다시 들어가는지에 좌절하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참, 옥탑은 모르겠는데 반지하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법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지하는...... 잠깐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나와도 몸에 곰팡이가 피는 듯 슬프다. 반지하 세 군데 둘러보고는 내가 좁은 집에서는 살지언정 반지하에서는 살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대출 상담을 하러 간 은행에서는 돈도 없는데 아는 것도 없어서 기가 죽는다. 은행 직원은 친절하지만, 그 앞에서 나는 연봉을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고, 최대 대출 금액을 물어보는데 또 한 톤 낮아진다. 남에게 꾼 만 원도 불편한 내가 1년 연봉보다 많은 돈을 꾼다는 생각만으로도 살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대출을 하고 어둡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밝지는 않은 전세 원룸을 계약한다. 옥탑과 반지하를 겨우 피하고 출퇴근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으로 마음을 위로한다. 소심하게 움츠러든 마음으로 계약금을 송금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건물주는 나와 동갑이다. 부럽지는 않지만 씁쓸함은 피할 수 없다.


이제 나도 대출의 세계에 입장했다. 입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