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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Sep 22. 2017

걸스 비 앰비셔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해리엇 롤러'는 잔디를 깎고, 야채를 써는 일까지 자기 방식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깐깐한 노인이다. 한 때는 미국 최고 광고 회사 수장이었던 그는 바로 그 완벽주의 성격 탓에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를 잃고 외로운 말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떤 내용의 부고 기사가 실릴지 생각하게 되고, 그의 성격처럼 완벽한 부고 기사를 독자들이 읽기를 바라며 자신이 최대 광고주였던 지역 신문사를 찾아가 사망 전문 기자 '앤'을 고용,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기사 작성을 돕는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감독 마크 펠링턴)은 메세지가 선명한 영화다. '소녀여 야망을 가져라.' 부고 기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글이다. 가족과도 연락하지 않는 노인이 주인공이기에 이 작품은 일종의 참회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롤러의 삶을 풀어내며 오히려 그의 현재 외로움이 치열한 도전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그는 반성은커녕 꿈 앞에 망설이는 앤에게 '나처럼 너만의 길을 걸으라'고 조언하며 부추긴다. 롤러·앤·브렌다는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이다. 그리고 브렌다는 마이너 중에 마이너인 흑인 여성이다. 이 의도적인 설정은 작품의 정체성을 더 분명히 한다.


 젊은 관객에게는 앤 역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눈에 띄겠지만, 정작 이 작품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주는 건 전설의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베네치아·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7회)의 존재감이다. 그는 자칫 훈계에 그칠 수 있는 이 작품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는다. 매클레인은 롤러를 까탈럽지만 밉지 않고, 예민하지만 유머러스한 캐릭터로 만들어 관객이 자연스럽게 그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차분하고 위엄을 갖춘 그의 말투와 목소리는 남성중심사회에서 롤러가 얼마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인지 알게 한다. 


 '내가 죽기 전에…'는 캐릭터의 힘으로 전진하는 작품이다. 롤러는 영화로 치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이고 드라마로 치면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다. 그는 독단적이지만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상처입은 마음 속에 깊은 정도 있는 인물이다. 관객은 이런 캐릭터를 싫어한 적이 없고, 롤러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다만 사이프리드가 연기한 앤은 롤러를 부각하기 위해 희생되는 도구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오히려 앤쥴 리 딕슨이 연기한 브렌다가 인상적이다. 브렌다는 제2의 롤러로서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극의 재미를 더한다.


 서사는 다소 헐거운 편이다. 영화는 결국 세 사람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데, 각 사건들의 온도차가 들쭉날쭉한데다가 관습적인 설정과 대사들이 적지 않아 특정 장면에서 관객을 다소 심드렁하게 할 수도 있다. 또 롤러의 캐릭터와 부합하지 않는 '너무 착한' 몇몇 이야기들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오히려 약화해 영화가 어떤 방향을 향해 가는지 알 수 없게 한다.


 도전을 강조하는 이 작품의 메시지가 요즘 관객에게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롤러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과 현재는 엄연히 다르기에 오히려 롤러가 이른바 '꼰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싶은 말'은 온통 자극적인 작품들이 즐비한 최근 극장가에서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편한 마음으로 매클레인의 명연기와 그의 캐릭터 롤러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 될 수 있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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