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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Sep 22. 2017

시대를 뒤엎은 광기

영화 '레이디 맥베스'

 "말은 실행의 정열에 찬바람을 몰아올 뿐이다."('맥베스' 2막 1장) 영화 '레이디 맥베스'(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이 말을 체현한다. 이 고요한 영화는 설명을 늘어놓기보다 보여준다. '캐서린'(플로런스 퓨) 또한 그렇다. 이를 테면 그는 왕 암살을 앞두고 고민하는 맥베스를 나약한 인간이라고 꾸짖으며 행동할 것을 충동하는 바로 그 맥베스 부인이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편보다 먼저 움직이는 진화한 맥베스 부인이다. 캐서린의 전진 방향은 왕좌가 아닌 삶을 옭아매는 모든 걸 거부하는 철저한 반항. 이 반항을 실행하는 조용하지만 노골적이면서도 전격적인 결단, 그게 바로 캐서린이며 영화 '레이디 맥베스'다.


 19세기 영국, 열일곱살 소녀 캐서린은 늙은 지주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에게 팔려가 그의 아들 '알렉산더'(폴 힐턴)와 결혼한다. 평화롭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돈을 주고 사온 며느리이자 아내인 캐서린을 감시·감독·구속할 뿐이다. 답답한 삶에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끼며 불만을 쌓아오던 그는 두 남자가 사업 관련 일로 집을 떠난 사이, 하인 세바스티앙을 만나 마음 속에 가둬놨던 욕망을 풀어준다. 이후 캐서린의 거침 없는 행보는 그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결정됐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격렬히 맞서며 결정된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힌다. 이건 욕망에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정적 뉘앙스가 다분한 그런 시선으로는 캐서린의 행동들을 윤리적으로 단죄할 가능성이 생기며, 이 방향은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선사하는 강렬하면서도 묘한 쾌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캐서린의 거부는 곧 결정의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다. 파국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파국을 선택한 건 캐서린이었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안전함 속에서 분노하며 말라가던 그는 내가 결정한 불안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을 찌우는 인간이다.


 캐서린은 '맥베스'의 멕베스 부인을 뛰어넘는다. 그는 저열한 방식으로 권력을 갈취한 맥베스 부부와는 다르다. 캐서린은 압제에 저항하는 인물이기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맥베스 부인과는 달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맥베스'가 인간 누구나 가진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낸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면, '레이디 맥베스'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전위적 계급 투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남성 중심 권력 체제를 전복하는 여성주의를 담은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캐서린은 심지어 나약한 남자에게도 벌을 내린다).

 캐서린의 섹스와 살인은 시대의 불합리와 그 시대에 종속된 인간들이 행하는 억압의 반작용으로 행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하인 애나(나오미 아키에)는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억지로 빗어 말아올리고, 코르셋으로 허리와 가슴을 강하게 조이며, 새장과 같은 크리놀린은 치마 안에 다리를 가둬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한다. 이런 폭력의 반대 급부로 머리를 풀고 옷을 벗고 바로 이 잘못된 사회가 가장 금기시하는 두 가지 행동을 실천하는 건 상징적이어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것도 없이 관객에게 짜릿함을 안긴다.


 이 작품의 원작인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레이디 맥베스'의 가장 큰 차이는 하인 애나의 존재다. 소설 속에 없는 그는 영화에서 캐서린과 대척점에 서있다. 애나는 캐서린의 '나쁜' 행동들을 주인에게 알리는 것은 물론 주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껴 말을 잃을 정도로 양심적인 인물이다. 캐서린은 같은 여자이면서 흑인이기까지 해 최악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그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건 애나가 캐서린의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존 체제에 종속돼 노예의 삶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시아버지나 남편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1996년생 배우 플로런스 퓨(Florence Pugh)다. 이 신인 배우는 카메라와 스크린을 넘어 극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놀라운 건 퓨가 어린 배우들이 흔히 보여주는 다소 과장된 감정 표현이 아닌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표정만으로도 캐서린이 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재능은 결코 흔하지 않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뛰어난 연출이 퓨를 돋보이게 하는 면도 있지만, 많은 장면에서(특히 캐서린이 쇼파에 앉아 있는 신)퓨가 올드로이드 감독의 영화를 더 빛나게 한다. 퓨는 '내 사랑'의 샐리 호킨스와 오스카를 놓고 경쟁할 자격이 있다.


(글) 손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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