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작가가 2013년 7월 내놓은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가까운 기억부터 서서히 잃어가는 은퇴한 늙은 연쇄살인마'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눈을 잡아 끌었다. 이 작품이 더 흥미로운 건 이 캐릭터를 풀어가는 방식과 그렇게 도달한 어떤 결론 때문이었다. 아포리즘에 가까운 문장들과 기괴한 유머로, 간결하면서도 정교하게 쌓아올려 단번에 무너뜨리는 구성의 충격은 연쇄살인마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스릴러의 습관적인 전개와는 분명히 구분됐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신연 감독과 설경구 등 출연 배우들이 수차례 밝힌 것처럼 원작 소설과 다른 작품이다. 영화의 각색 방향은 스릴러다. 이 과정에서 남은 건 딸을 가진 치매에 걸린 범죄자라는 설정 하나다. 주인공의 반사회적인격장애는 사라졌고, 허상에 가까운 두 인물이 살아났다. 그러면서 원작에는 없던 대결 구도가 발생한다. 소설과 영화를 확연히 구분하는 또 한 가지는 주인공을 추동하는 강력한 감정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부성애다.
김병수(설경구)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그는 평생 수의사로 일하며 딸과 함께 살아왔지만, 병세가 악화해 일도 그만둬야 하는 상황과 마주한다.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실 연쇄살인마다. 평생 사람을 죽이며 살아오다가 십수년 전 한 사건 이후 살인을 멈췄다. 그런 그 앞에 젊은 살인마 민태주(김남길)가 나타난다. 우연히 그를 알게 된 김병수는 민태주가 자신과 같은 연쇄살인마임을 직감하고, 딸 은희(김설현) 주변을 맴도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같은 설정을 통해 소설은 인간 심연으로 들어가고, 영화는 장르물로 나아가니 영상이 글을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영화가 가진 스릴러로서 매력을 짚어봐야 할 텐데, 이 지점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은 보통 이상을 해내지 못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각색 과정에서 빼낸 건 기억이고 더한 건 사랑이다. 빼낸 것에 아쉬움이 남고, 더한 것에 의구심이 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을 전진케 하는 건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감정은 심지어 치매마저 일부 극복하는 것처럼 그려지고, 그 사이 기억과 망상이라는 원작의 핵심 설정은 흐려져 단순 걸림돌 역할로 전락한다. 소설은 과연 김병수의 독백들이 정확한 기억일까에 관한 끊임없는 의심을 하게 하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치매 환자의 기억을 믿어버린채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는 그렇게 기억의 불명확함에서 나오는 서스펜스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결론을 향해 간다.
캐릭터 설득력이 떨어지는 약점도 있다. 소설 김병수는 '완벽한 어떤 것'을 위해 살인하는 사이코패스다. 독자는 기억을 잃어가는 그를 먼 거리에서 관찰할 뿐이다. 그가 딸을 지키려는 이유도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원칙 때문이다. 소설은 김병수를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영화는 김병수의 불운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그의 살인을 작게나마 정당화한다. 딸을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관객이 더 가깝게 와닿기를 바라는 설정이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수십년간 수십명을 죽인 사람을 응원할 수 있는 관객은 많지 않다. 그의 절절한 마음이 와닿지 않으니 스릴러로서 매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설경구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경험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험담을 들을 수도 없는 병을 나름의 상상력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며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순간의 눈빛 변화로 김병수의 상태 변화를 보여주는 연기는 그가 왜 대한민국 최고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지 알게 한다. 김남길과의 호흡은 최소한 이 작품을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게 한다. 두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만드는 긴장감이 이 영화 관전 포인트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원신연의 '살인자의 기억법'의 차이는 치밀함에서 발생한다. 소설을 스릴러 영화로 변형한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건 선택의 문제다. 중요한 건 일단 정한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느냐다. 원신연의 영화가 김영하의 소설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건 소설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가 소설보다 덜 집요하다는 뜻이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