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
작품성이 뛰어나지도, 완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도, 사회를 바라보는 냉엄한 통찰도 없다. 전에 없던 영화적 경험을 안기는 그런 작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겉으로는 흔히 말하는 평범한 '휴먼코미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속 안에 담긴 남다른 용기와 진실된 사과, 응원과 위로를 꺼내보여 관객의 가슴을 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따뜻하고 바른 영화다.
옥분(나문희)은 20여년간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민원 8000건을 제기해 구청 직원들에게 '도깨비 할머니'로 불리는 인물이다. 모두가 옥분 상대하는 일을 꺼리던 차에 민원접수창구에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새로 온다. 민원왕 할머니와 깐깐한 공무원의 대립으로 긴장감이 팽팽해지고 있던 때, 잘 늘지 않는 영어 실력에 의기소침해 하던 옥분은 외국인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민재를 우연히 본 후 그에게 영어 과외를 부탁한다. 그러자 민재는 어떻게든 과외를 맡지 않기 위해 옥분을 피해다니기 시작한다.
김현석 감독은 숱한 영화들이 선보인 '선(先)웃음 후(後)눈물' 공식을 적극 가져오면서도 이 닳고 닳은 설정을 관객이 거부감 없이 즐기게 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스카우트'(2007) '시라노:연애조작단'(2010) 등 김 감독 전작의 공통점은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도 그렇다. 그는 극도로 희화화된 캐릭터나 엽기적인 설정을 내세우는 법 없이 편안한 웃음을 이끌어낼 줄 안다. 눈물을 뽑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나 강요 없이 차분히 감정을 쌓은 뒤 관객을 설득하고, 영화 속 눈물을 납득시킨다.
이 작품이 유사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역시 일본군 위안부라는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정적으로 강한 호소력을 가진 역사적 사실을 소재 삼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이 거대한 비극을 무작정 관객의 화를 돋우는 데 쓰지 않는다. 쉽게 분노하면서 제자리에 머무는 대신 그 아픔들을 공유하고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용기내고 희망하고, 가해자를 위엄있게 꾸짖는 일을 잊지 않고, 그 와중에도 품위와 유머를 잃지 않은 채 한 발 더 전진한다. 이런 태도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떤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같은 편'인 우리를 먼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끔은 분노하지만, 역사의 상흔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우리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민재를 비롯한 옥분 주변 인물들은 옥분의 과거를 알고 난 후 그 아픔을 개인의 비극으로서 연민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깊고 긴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극복해야 할 할 역사적 상처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사려깊고 올바른 연출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관객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건 배우 나문희의 존재 덕분이다. 한 마디로 나문희는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TV시트콤에서 이미 선보인 적 있는 절정의 코미디 연기는 물론, 친구의 병을 걱정하는 눈의 떨림, "저녁 먹고 가라"는 평범한 대사 한 마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독보적인 눈물 연기의 페이소스까지…. 일단 보기 시작하면 어떤 관객이라도 인정하고 빠져들 수밖에 없다.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한 영화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배우의 존재감이 무엇인지 나문희는 명확히 보여준다(나문희는 기자간담회에서 "이 나이에 영화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헸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