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마더!'(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당황스럽다. 평화를 깬 이방인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스릴러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정상 범주를 벗어난 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키고, 그들이 만들어낸 비전형적인 상황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붙이며 충격적이고 대담하게 내달린다.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는 듯한 극도의 혼란과 당혹을 121분간 견디고 나면 다시 당황스러운 질문이 마음 속에 들어앉는다. '아, 이게 대체 다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애러노프스키의 영화는 언제나 파괴적이었다. 데뷔작인 '파이'(1998)에는 괴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내놓은 두 편의 걸작 '레퀴엠'(2000)과 '블랙 스완'(2010)도 다르지 않았다. 한 편은 인간의 나약함에 닥친 비극을, 또 다른 한 편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욕망의 광기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이미지에 담아 관객을 찍어눌렀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의 영화는 인간 존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언제나 같았다. '과시와 과잉'이라는 지적이 따라붙은 것도 그래서였다. 다만 그의 작품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방식이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영감이 메말라버려 고통스러워 하는 시인(하비에르 바르뎀)은 새로운 작품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한 남자를 집 안에 불러들인다. 아내(제니퍼 로런스)는 둘만의 공간에 낯선 사람을 부른 그 행동이 마뜩잖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재기를 바라며 받아들인다. 그런데 남편을 찾아온 이 남자, 수상하다. 남편과 너무 잘맞는 것도 미심쩍고, 우연히 본 그의 짐가방에 남편 사진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의심은 점점 커지는데, 이 남자는 손님 주제에 자신의 아내까지 집으로 끌어들인다. 여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부부를 점점 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
새 영화 '마더!'에서도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관심있는 건 여전히 인간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기 위해 이번에 그가 택한 길은 압축과 폭발이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단 121분만 활용해, 오직 한 채의 집 안에, 인류의 장대한 역사를,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욱여넣는다. 인류의 탄생을 시작으로 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작은 집안 곳곳에 빼곡히 들여놓는 그의 야망은 전작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용량을 넘어선 것들이 가득 들어찼으니 이제 이 모든 게 터져버리는 일만 남았다. 영화는 결국 거대한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 이 모습을 바라보며 관객은 그렇게 멍하니 충격에 빠진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전복(顚覆)하는 건 이런 시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게다(이 작품의 워킹타이틀은 'six days'(여섯 번째 날)로, 이날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창세기에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인류가 저지른 죄도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지르면서 인류의 고통은 비로소 시작되는데, 마치 선악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특정 시퀀스는 그래서 중요하다(두 남녀는 남편이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린 직후 성교를 나눈다). 이들의 두 아들, 그러니까 카인과 아벨의 등장과 카인이 저지르는 인류 첫 번째 살인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건 파국의 전조다. 이제 세계는 그렇게 더이상 수습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약탈·방화·강간·납치·테러·전쟁, 인류가 저질렀으며 현재도 자행하는 온갖 폭력이 '지금 여기', 집 안에서 벌어진다. 종교마저 폭압으로 변질된지 오래다. 아내가 꿈꾸던 낙원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다. 한꺼번에 닥쳐 당황스러울 뿐 이 충격은 모두 인류가 행한 일들이다.
흥미로운 건 '마더!'가 진짜 보려주고 싶어하는 게 이 타락한 인간 군상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성경을 설정만 달리해 복습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시인보다 중요한 건 시인의 아내다(카메라가 오직 아내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을 바라보는 건 필연적인 연출이다). 시인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그는 남자를 자식처럼 보살피고, 여자에게서는 관대한 분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나중에는 추종자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는 사람, 시인의 아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의 존재 이유가 바로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하려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의 핵심일 게다.
아내를 한 마디로 정의할 이유는 없다. 그의 행동을 보고 이해하면 된다. 그는 시인의 집을 낙원(paradise)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수습하려는 사람이다. 떨어진 프라이팬을 보고, 엎질러진 물컵을 보고 그는 "내가 처리할게"(I got it)라고 말한다(그는 결국 어떤 일도 처리하지 못한다). 살인 과정에서 흘려진 피를 외롭게 닦아내는 게 바로 아내다(이때 아내는 남편의 부재를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씩 분노하기도 하는 자다. 그 분노를 쌓아 결국 폭발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내는 누군가의 해석처럼 대자연도, 마리아도 아니다. 그는 그저 인간이다. 이 세계의 목격자이며 피해자다. 무질서를 만든 것도 인간이지만, 그 속에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바로 인간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아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그리려는 가장 궁극적인 모습은 철저히 침묵하는 신(남편) 앞에서 인간(아내)이 파국을 목도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는 것이다. 영화는 너무나 잔인하지만 그게 인간이고, 이 세계의 정체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기적인 신은 자신의 창조 행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창조가 빚은 어떤 불행에도 책임지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 이렇게 썼다.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 믿음의 공간인 수도원에서 벌어진 모든 참상을 목도한 주인공이 탄식하듯 읊조린다. 그렇다. 이 세계에는 인간이 있을 뿐 신은 없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사일런스'가, 이창동의 '밀양'이, 코언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모두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니 이 고통들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인다는 것.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고난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게 바로 아내가 처한 상황이며, 우리가 절망을 견뎌온 과정이다. 이것이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인류사를 압축하며 전달하려한 바로 그 이야기다.
이제 아내는 남편에게 아들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이 설정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낸 것을 상징한다). 더이상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일까. 애러노프스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남편은 아들을 뺏아기 위해 말한다. "난 그의 아버지야."(I'm his father)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내가 외친다. "난 그의 엄마야!"(I'm his mother!) 이 난장판 속에 그나마 남은 건 결국 사랑이다. 우리는 신을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의지한다. 그러나 세상을 그나마 유지하게 하는 건 아버지의 창조가 아니라 엄마(mother!)의 사랑이다. 영화가 아내의 사랑(heart)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복원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