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감독 츠키카와 쇼)를 '일본식 멜로 드라마'로 쉽게 수식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죽어가는 소녀와 외톨이 소년 사이의 사랑과 이별은 너무 흔해빠진 식상한 소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극적 설정에 도취돼 또 한 편의 그저그런 영화가 되는 길을 가는 대신, 이 서글픈 사랑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며 전진해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는 이를 테면 사랑을 찬양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응원하는 작품이다.
하루키(키타무라 타쿠미)는 병원에 갔다가 누군가 떨어뜨린 공책을 우연히 줍는다. '공병문고'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노트에는 췌장암에 걸린 어떤 사람의 일기가 적혀있다. 잠시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주인이 나타난다. 놀랍게도 공병문고의 주인공은 같은 반 친구인 '사쿠라'(하마메 미나미)다. 사쿠라는 외톨이인 하루키와는 다르게 모든 친구들이 좋아하는 인기 최고의 학생. 사쿠라의 비밀을 알게 된 하루키, 오직 가족만 아는 비밀을 하루키에게 들킨 사쿠라, 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이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본 멜로영화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작품에는 '러브레터'(1995)의 아련함도, '냉정과 열정 사이'(2001)의 분위기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헛헛함도 없다. 오히려 대개 진부하다. 시한부 인생과 도서관 로맨스를 포함해 많은 부분에서 앞서 나온 멜로영화 설정들을 답습한다. 활짝 핀 벚꽃 배경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익숙한 건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제목만 특이한 영화라는 혹평(때로는 부당한)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케케묵은 것들 사이에서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를 건져올리는 건 이 작품의 메시지에 담긴 진솔함과 올바름이다. 영화는 관객을 향해 '어떤 하루를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끈기 있게 던진다. 사쿠라와 하루키의 어설프지만 풋풋했던 연애의 끝에 교훈을 담아낸다는 게 아니다. 츠키카와 쇼 감독은 관객이 직감적으로 느끼게 한다.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어떤 사고로 인해 네가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너와 내가 가진 시간의 가치는 같아." 시한부 인생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씩씩한 소녀의 농담 정도로 들렸던 이 대사는 영화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고나면 다른 의미가 돼 돌아 온다.
사쿠라와 하루키의 이야기가 어른이 된 하루키의 회상을 통해 보여지는 것, 하루키의 현재에 사쿠라의 또 다른 친구였던 코쿄가 등장하는 건 짚고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중요한 건 과거의 슬픈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이들의 현재 삶에 어떤 것이었냐는 거다. 사쿠라는 죽었어도 하루키는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지금도 외톨이이고, 사쿠라와의 이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루키는 여전히 그때의 하루키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슬픈 과거에 머물러만 있는 청승맞은 남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여기서 멈췄다면, 원작 소설이 일본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게다. 하루키는 이제 한 때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쿠라가 되려 한다. 그는 십여년이 지난 현재 우연히 그때 그 소녀와의 일들을 되새기는 기회를 얻고, 그 짧은 시간이 가져다 준 게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건 하루하루를 사랑해마지 않던, 삶을 향한 사쿠라의 태도였다. 하루키가 그제서야 친구가 건넨 껌을 받아들고, 그토록 어려웠던 "친구가 돼 줄래?"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사쿠라가 하루키에게 '어린왕자'를 선물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사쿠라식 삶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루키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단단함이 있기에 스스로 외톨이가 되는 걸 택했다. 사쿠라의 비밀을 안 사람이 다행히도 하루키였기에 사쿠라는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삶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쿠라의 삶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의해 마감돼도 괜찮다.
"너의 췌장을 먹고싶다"는 대사는 말장난이 아니다(사쿠라는 신체 아픈 부위를 낫게 하려면 다른 사람의 해당 부위를 먹어야 한다는 미신을 이야기한다). 이건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상대의 장점을 흡수해 더 좋은 인간이 되고, 나아가 삶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다짐의 시적 표현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이런 면에서 의젓하고 올바르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