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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Dec 12. 2017

진실을 노려보다

영화 '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55) 감독의 새 영화 '세 번째 살인'은 고레에다스럽다. 최근작들과 비교하면 장르가 바뀌고 시선이 달라져서 이 변화를 당황스러워 할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상의 빛'(1995) '아무도 모른다'(2005) '걸어도 걸어도'(2009)를 본 관객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고레에다 영화는 어떤 작품보다 현실적이고 냉정했다. 그는 한가하게 긍정적인 말을 늘어놓거나 쉽게 희망을 언급하지 않았다. 고레에다는 때로 냉소적이기까지 했는데, '세 번째 살인'에는 그의 그런 섬뜩한 얼굴이 있다.


  고레에다의 첫 번째 스릴러 영화로 알려졌지만, 이 작품은 사건이 점차 해결돼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장르 특유의 쾌감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관객의 혼란은 가중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는커녕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 마냥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의 실체는 주장과 추측에 가려져만 간다. 구분과 판단을 무색하게 하는 이야기를 다 본 뒤에 밀려오는 감정은 일종의 좌절감이다. 그리고나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인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진실이란 무엇인지.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강도·살인 사건의 가해자 미스미(야쿠쇼 코지)의 변호를 맡는다. 미스미는 과거 같은 범죄를 저질러 30년형을 산 전과가 있어 이번에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어렵다. 시게모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극형만은 면하게 하는 것. 이에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사형을 받지 않을지도 모를 단서를 잡고 변론 계획을 짜나간다. 그런데 미스미의 말이 자꾸만 번복되는 게 수상한 데다가 그와 피해자 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되자 시게모리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세 번째 살인'에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정교한 연출력이 살아있다. 영화는 스펙터클과 거리가 멀고 느리게 진행되지만, 단단히 날 선 분위기에는 묘한 긴장감이 배어있다. 대사 하나를 낭비하는 법이 없고, 쉽게 촬영한 신과 시퀀스도 보이지 않는다. 전작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더 공격적인 설정들과 미쟝센은 메시지를 더 명확하게 전달한다. 후쿠야마 마사하루를 비롯한 배우들은 절제돼 있지만, 세밀한 연기로 이 작품의 공기를 담는다. 히로세 스즈의 눈빛은 특히 잊기 힘들다.

  이 작품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세계를 확장한다. 그는 이제 가족을 넘어 사회를 본다.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머릿속에 눌러담아왔던 생각과 질문을 적극  쏟아낸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심판할 수 있다면,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악을 방관하는 자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더라도 적극적으로 그 악을 제거하려는 자 중 누가 더 나쁜 인간인가. 진실은 무엇이며, 사람들 혹은 사회는 진실을 정말로 원하기는 하는가.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은 고레에다 감독이 이전에 단 한 번도 던진 적 없는 것들이다.


 이 질문들에는 세계에 대한 근심이 있다. 그건 우리가 언제나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던 진실이라거나 이해라는 게 없어도 이 사회는 무리 없이 돌아간다는 탄식이다. 시게모리가 재판은 이기면 그만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나 판사가 소송경제를 언급하는 것, 피해자의 아내가 딸에게 원활한 공장 운영을 이유로 침묵을 종용하고, 검사가 증인석에 선 딸을 은근히 윽박질러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장면 등은 다 같은 맥락이다. 진실은 거대한 힘이 단번에 묻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각 없는 다수에 의해 서서히 침몰한다.


  카메라는 진실과 이해에 도달하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안다. 영화는 시게모리가 미스미를 면회해 사건에 관해 대화하는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잡아낸다.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촬영해도 두 사람 사이를 가른 유리벽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상징적이다. 두 사람의 옆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한 시퀀스에는 마치 유리벽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일 뿐이다. 유리벽 건너 시게모리의 얼굴과 유리벽에 비친 미스미의 얼굴은 기어코 겹쳐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번 가라앉은 진실을 끌어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법정물로 불리지만, 흔한 영화들이 그리는 법정 공방은 없다. 영화에는 재판을 준비하는 시게모리와 미스미의 대화, 미스미 주변 정보를 얻기 위한 시게모리의 조사 과정이 담길 뿐이다. 중요한 건 이 정보가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시게모리는 물론이거니와 판사나 검사, 재판을 지켜보는 배심원 그리고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판단해 미스미에게 형(刑)을 내려야 한다. '진실'은 그렇게 알아보기 힘든 모양새로 '사실'에 달라붙어 있어서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려고 노력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스미가 저지른 두 번의 살인, 그리고 미스미에 대한 사형이 아마 세 번째 살인일 것이다. 다만 이 세 번째 살인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미스미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한 그의 행동 이면에 어떤 이유들이 있었는지 이해해볼 여지가 있었다는 거다. 다시 말해, 그는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완전히 나쁘지는 않은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간극을 노려본다. 후쿠야마 마사하루, 야쿠쇼 코지 그리고 히로세 스즈의 인상적인 눈빛이 곧 고레에다의 마음이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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