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염력'
'돼지의 왕'(2011) 때부터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애정했다고 자부하는 관객에게 연 감독의 새 영화 '염력'(1월31일 개봉)은 강렬하고 날카로웠던 전작들과 달리 순하고 뭉특한 작품으로 보여 불만족스러울지 모른다. '부산행'(2016)에서 보여준 장르적 쾌감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에 발을 디딘 관객의 기대감 또한 쉽게 충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염력'은 할리우드가 한껏 높여놓은 슈퍼히어로판타지 장르의 기준을 충족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연 감독의 신작은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친절하고 대중적인 화법의 오락영화다.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한국 영화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야인 히어로물에 과감하게 발을 내민 새로운 도전이 담겨있다. B급 코미디와 히어로 장르를 섞어놓고 우리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흔치 않은 시도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연상호라서 아쉬운 것과 연상호라서 할 수 있는 것이 혼재된 영화가 '염력'이다.
경비원으로 일하며 혼자 살아가는 석헌(류승룡)은 어느 날 약수터에서 이상한 맛이 나는 물을 마신 뒤부터 초능력을 갖게 된다. 생각하는대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이상한 능력에 어리둥절해 하던 그는 십여년 전 헤어져 연락을 끊고 살았던 딸 루미(심은경)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처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장례식장에 갔다가 루미가 도시 재개발 문제로 위기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딸을 위해 쓰기로 한다.
'염력'은 1000만 관객을 달성한 연 감독의 전작 '부산행'보다 더 통속적이다. 좀비라는 생소한 소재가 최소한의 진입장벽을 쳤던 작품이 '부산행'이었다면, '염력'은 마치 한국 관객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한 듯한 인상까지 풍기는 쉽고 편한 영화다. 아버지와 딸의 갈등과 화해는 숱한 드라마·영화가 다뤄온 인기 소재다. 슈퍼히어로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사회비판은 현재 한국영화계 유행 코드 중 하나다. '7번 방의 선물'(2012)이 1000만 관객으로 입증했듯 류승룡의 코미디 연기를 싫어하는 관객은 많지 않다.
이런 대중성은 의도적이다. 연 감독은 실사영화로 보여줄 것과 애니메이션·만화로 선보일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행코드가 적극 반영된 상업영화는 실사로, 실사영화 데뷔 이전 처절하고 징글징글했던 연상호의 애니메이션 세계는 그대로 애니와 그래픽노블이 이어받는 식이다. '부산행'과 애니 '서울역'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처럼, '염력' 또한 그래픽노블 '얼굴'이 출간된 직후 개봉하는 건 매체별로 연출 방식을 달리하겠다는 연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염력'에 담긴 '한 발 더 나아간 상업성'은 온갖 익숙한 것들을 뒤섞는 과정을 통해 '낯선 어떤 것'이 될 가능성을 남긴다. 초능력·가족·코미디·현실풍자 그리고 세계를 향한 냉소와 희망을 러닝타임 100분에 담는 시도는 앞선 어떤 한국영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이 작품에 담긴 다양한 요소들은 정교하게 결합하지 못했고, 그 결과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완성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건 분명한 약점이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고, 실사영화로 상업성까지 아우르는 능력을 보여준 연상호라는 이름값을 생각하면 어느 쪽에서도 강력한 한방을 뻗지 못하는 '염력'에 관객이 느낄 아쉬움은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력'에는 연 감독의 번뜩이는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홍 상무(정유미)가 석헌에게 진짜 초능력이 무엇인지 장난기 어린 말투로 설명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진짜 초능력은 저기 위에 있는 분들이 가지고 있다'는 홍 상무의 일갈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게 되는 건 관객도 다르지 않다. '염력'의 악당은 석헌처럼 초능력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염력 따위는 없어도 초능력에 가까운 권력을 타고난 바로 그들이다. 관객은 최근 몇 년 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홍 상무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영화가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염력'이라는 소박한 느낌의 제목에 담긴 건 이 사회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라 아주 작은 희망 혹은 바람이다. 석헌은 초능력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망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딸이 상처받지 않게끔 힘을 사용할 뿐이고, 딸의 고단한 일상에 내 힘이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고, 내 힘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글)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