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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Mar 08. 2018

익숙한 힐링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58) 감독의 새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푸근하다. 자전거로 30분을 달려야 장을 볼 수 있는 깊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내내 느리고 순하다. 그곳에는 사계를 절감할 수 있는 자연이 있고, 그곳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내달리다가 멈추고 돌아왔고, 누군가는 상처받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또 누군가는 그곳에서 평생 살았다. 다 각자 삶이 있을 뿐 아무렴 어떤가. 그저 이들의 일상과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가슴 속에 온기가 담긴다. '작은 숲'은 바로 그 따뜻함을 의미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혜원(김태리)은 대학교를 마치고 임용고시를 준비해왔지만, 실패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집으로 돌아온다. 잠깐 휴가라며 떠나왔지만, 혜원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던 고향의 맛에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는 그곳에서 재회한 옛 친구 재하(류준열)·은숙(진기주)과 함께 밥을 해먹으며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낸다. 그러면서 수능이 있던 날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흔히들 사용하는 '힐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야기 자체가 그렇고, 임 감독의 고요한 연출 방식이 그러하며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유머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아름다운 계절들이 각양각색으로 담겨 눈이 즐겁다.


 물론 이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너무 평범한 위로라는 것. 힐링이라는 말이 이미 철지난 단어인 것처럼 '삼시세끼'와 같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히 받아왔던 위안을 이제와서 영화로 반복해야 하는 이유를 이 작품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각색의 실패로 봐야 한다. 원작을 10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담으려다보니 정작 핵심 요소를 대거 놓치는 결과가 됐다.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 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2008년 내놓은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모리 준이치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공통점은 만화와 일본영화 모두 2부작으로 제작됐다는 점이다. 일본 영화 두 편을 합친 러닝 타임은 232분으로 4시간에 달한다. 모리 감독은 원작의 의미를 살리는 데 주력했고, 임 감독은 원작을 적극 쳐내고 이를 테면 '한국식'으로 보편화했다.


 원작은 형식과 메시지가 일치했다. 계절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보여주고, 음식 만드는 과정과 식재료를 직접 기르고 채취하는 모습을 과하다싶을 정도로 묘사한 건 주인공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차츰 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최대한 성실히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의 어떤 깨달음에 관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또 모리 감독의 영화는 음식을 '먹방'에 그치게 하지 않았다. 재료 수확 자체가 어려운 요리, 재료를 오랜 시간 땅에 묻어둬야 하는 요리, 긴 시간 발효가 필요한 요리, 데치고 볶고 삶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요리, 재료를 다듬은 수고에 비해 그 양이 턱없이 적은 요리 등을 통해 우리네 평범한 삶의 양상을 은근히 드러냈다. 이때문에 모리 감독에게는 23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 필요했다.


 임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는 러닝 타임을 줄이기 위해 원작의 가장 중요한 개성을 들어냈다. 그 결과는 '힐링'이라는 상투적인 단어가 잘 설명한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 생활에 지친 한 여성이 고향 시골에서 인스턴트 아닌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이야기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 작품이 그간 다양한 장르에서 누구보다 정확한 연출을 선보여온 임 감독의 영화라는 점은 더 뼈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 배우들의 연기는 칭찬받아야 한다. 김태리와 류준열은 최적의 캐스팅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호흡을 보여준다. 과장되지 않은 두 사람의 연기는 극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는다. 진기주는 영화 데뷔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보이며 앞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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