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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Feb 20. 2018

연대와 투쟁의 사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어떤 혹독한 비평가라도 이 영화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셰이프 오브 워터'(2월22일 개봉)에서 펼쳐보이는 마법과 같은 순간들을 모두 경험하고나면 120분 남짓한 이 짧은 시간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말 그대로다. 이 작품은 황홀하다. 물 속에 잠긴 집과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는 가구들, 그리고 그곳에 잠들어 있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아리송한 첫 번째 시퀀스만으로도, 관객은 무장해제된다.


 1960년대, 언어장애를 가진 여인 일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미 항공우주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비밀 실험실에 생포돼온 괴생명체와 마주한다. 신비로운 그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일라이자는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몰래 접근을 시도, 둘은 함께 음악을 듣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교감하게 된다. 그러던 중 스트릭랜드가 그 생명체를 해부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는 걸 안 일라이자는 그를 탈출시키기로 결심한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셰이프 오브 워터'는 '프랑켄슈타인'(1931) '킹콩'(1976) '가위손'(1990) '미녀와 야수'(1991) 등에서 익히 봐왔던 괴물과 여인의 사랑을 그린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일 수 있다. 열거한 작품들보다 다분히 에로틱하다는 점만 빼면 델 토로 감독과 짝을 이루는 단어인 동화(童話)라는 말을 또 한번 끌어들여도 무방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상대가 가진 게 아닌 갖지 못한 걸 지지하는 사랑은 명백히 아름답다. 더군다나 이 작품 배경이 정치·군사·외교·사회 전 분야에서 반목하던 1960년대 미국이라면 이 사랑은 더 충만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델 토로 감독이 1년에 가까운 시간과 억대 자비를 들여 일일이 스케치해가며 완성한 괴생물체의 모습과 이를 스크린에 구현해낸 기술력은 이 거침없는 사랑에 신비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1960년대를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시대로 재탄생시킨 미술 또한 탁월하다. 정확하고 유머러스한 편집과 이 판타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은 또 어떠한가. 어쩌면 허무맹랑할지 모를 이야기 속에 관객을 안착시키는 샐리 호킨스의 감성 또한 실로 뛰어나다. 이 작품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부문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뤄냈다는 방증이다.



 다만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저 아름다운 멜로로, 델 토로 감독의 연출을 상찬하는 정도로, 호킨스의 흡인력 있는 연기에 박수를 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이 '운명적'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일라이자는 사랑을 쟁취했다. 그는 진실한 사랑을 스스로 찾아나섰고,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다시 말해 그는 운명을 만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라이자의 마스터베이션과 그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괴생명체와의 섹스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상징적이다.


 빼먹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일라이자의 '사랑 투쟁' 과정에 일라이자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친구 젤다와 자일스, 그들은 힘을 모아 그들 또한 원하는 바로 그 사랑을 함께 이뤄냈다. 그러니까 사는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대로 살기 위한 투쟁과 연대가 '셰이프 오브 워터'가 그려내는 사랑의 핵심이다.

 델 토로의 새 영화는 아름다운 로맨스이자 약자·소수자들의 적극적인 운동(movement)이다. 일라이자는 여성·장애인·고아·노동자이며, 젤다는 여성·흑인·워킹맘·노동자이고, 자일스는 노인·무직자·동성애자다. 이들은 시대에 맞서 더이상 참지 않고 힘을 모아 주체적인 삶을 열어젖히려 한다. 이때 일라이자가 자일스를 설득하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건 필연적이다. 자리에 주저앉아 복종하는 남편을 경멸하는 젤다의 모습 또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 외부로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렬하게 벌어지던 냉전 시대이며, 내부에서는 마틴 루서 킹으로 대표되는 인권 운동(The Civil Rights Movement)이 촉발한 저항의 시기다(극중 TV에서는 인권 운동의 양상이 보도된다). 불화는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는 '노예 12년'(2013) '문라이트'(2016) '히든 피겨스'(2016)와 같은 작품을 주목하고, 권력자의 성폭력에 대항하는 '미투'(Metoo) 운동의 중심이 됐다. 델 토로 감독은 일라이자와 친구들을 통해 '이런 시대'에 약자·소수자가 취해야 하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라이자는 오르페움 극장 위에 산다.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딴 이 극장에서는 영화 '룻 이야기'(1960)가 상영 중이다. 룻은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여인이었다. 그리고 일라이자는 오르페우스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에우리디케가 아니라 오르페우스를 이용해 스스로 지옥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진화한 에우리디케'다. 그래서 그는 돌이 돼 죽지 않고, 살아서 행복할 수 있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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