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팬서'
2008년 5월 '아이언맨' 나온 이후 마블 스튜디오는 10년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Marvel Cinematic Universe)라는 세계관 아래 17편의 작품을 내놨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건 복잡한 작업을 요한다. 각 독립된 영화로서 재미를 잡으면서 전작들과 연결성을 고려해 이야기를 펼쳐야 하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시리즈의 인물 관계를 설정해야 하며, 개별 캐릭터의 변화·성장도 담아야 한다. 다음 작품을 위해 각종 복선을 깔아 관객의 관심을 붙들어 두는 것도 필수다. DC엔터테인먼트가 세계관 형성 자체에 애를 먹고, 20세기폭스가 각 영화 사이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과 달리 마블은 그동안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세계관 구축 능력을 보여줬다.
마블은 올해 5월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로 공들여 쌓아온 MCU 1기 마감에 들어간다(최종 마무리는 '어벤져스4'). 이 맥락에서 '블랙 팬서'(감독 라이언 쿠글러)를 향한 전 세계 관객의 기대감은 단순히 마블의 새 영화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시빌 워'(2016)에서 첫 등장한 뒤 앞으로 MCU 2기를 이끌 새 영웅의 첫 번째 솔로 시리즈라는 점과 함께, '인피니티 워'로 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블랙 팬서'는 개별 영화로서 완성도를 충족하는 것은 물론 MCU 1기에 막차를 타고 정식 합류한 영웅으로서 세계관 연결고리 역할도 해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랙 팬서'는 이 임무를 흠잡을 데 없이 수행한다.
소코비아 사태('시빌 워')로 왕 티차카(존 카니)를 잃은 아프리카 국가 와칸다는 차기 왕이자 수호자 블랙 팬서로 그의 아들 티찰라(채드윅 보즈먼)를 추대한다. 슬픔 속에 왕위에 오른 티찰라는 영국 박물관에서 비브라늄(우주 최강 금속으로 와칸다에서만 생산)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도난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블랙 팬서로 변신, 추격에 나선다. 범인은 과거 와칸다에 잠입해 비브라늄을 훔치려했던 율리시스 클로(앤디 서키스), 블랙 팬서는 서울에서 그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불의의 습격을 받아 클로를 놓친 채 와칸다로 복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남자(마이클 B 조던)가 클로의 시체를 가지고 와 티찰라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가장 혁신적인 영웅'이라는 홍보 문구는 '블랙 팬서'가 할리우드 기술력이 집약된 최고급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초인적인 힘은 물론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를 능가하는 부와 과학기술을 갖춘 블랙 팬서의 액션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와칸다의 압도적인 테크놀로지를 과시하듯 설명하는 시퀀스들에는 마블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담겼다. '시빌 워'에서 보여준 것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블랙 팬서 슈트는 마블 마니아는 물론 일반 관객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근사하다. '블랙 팬서'는 135분을 꽉 채운 이견의 여지 없는 특급오락영화다.
마치 '라이온 킹'(1994)을 연상케하는 전통적인 성장 서사에도 불구하고 '블랙 팬서'를 혁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작품이 취한 어떤 태도 덕분이다. 마블이 본격적으로 선보인 흑인 영웅이라는 상징성이 그 핵심이다(팔콘·워머신은 조연).
티찰라(블랙 팬서)가 세계 최빈국으로 위장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며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진 아프리카 나라의 왕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흑인 인권 문제를 놓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매파와 비둘기파를 모두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다.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과(功過)를 용기있게 지적할 정도로 윤리적이기도 하다. 마블은 그들의 첫 번째 흑인영웅을 MCU의 두 축인 캡틴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을 정신적·신체적으로 뛰어넘는 인물로 설정해 백인 남성 위주로 구성돼온 미국식 영웅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너무 완벽하게 설정돼 캐릭터 매력이 반감하기도 한다).
흑인 영웅의 이야기를 흑인 감독과 흑인 배우가 흑인의 문화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블랙 팬서'는 또 한 번 인상적이다(블랙 팬서는 1960~70년대 활동한 급진적 흑인 인권 단체의 이름이다). 아프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광대한 자연과 선명한 색상 대비, 전통적인 춤과 의상이 최첨단 기술과 결합한 모습은 이 작품을 더 이채롭게 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토르:라그나로크' 등에서 뛰어난 음악 활용을 보여준 마블은 '블랙 팬서'에서 타악기 위주의 아프리카 전통 음악부터 최신 유행하는 트랩 비트 힙합을 이물감 없이 섞는 능력을 선보이기도 한다.
'스파이더맨:홈 커밍'(2017) '토르:라그나로크'(2017) 등 마블의 전작들이 영웅들 간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재미를 봐왔던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다른 영웅을 배제한 채 오직 블랙 팬서와 와칸다에 집중한다(쿠키 영상에 가서야 우리가 아는 얼굴이 등장한다). 따라서 '인피니티 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면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일부 마니아들은 이 지점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다만 와칸다에서만 생산된다는 우주 최강 금속 비브라늄의 무궁무진한 활용 방식을 공개했다는 건 '인피니티 워' 이후 MCU에서 이 물질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캡틴 아메리카가 기존에 들고다니던 동그란 방패가 바로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졌다). 일례로 지난 4일(현지 시각) 마블이 미국 슈퍼볼 광고에서 공개한 또 다른 '인피니티 워' 예고편에 와칸다에서 캡틴 아메리카에게 새롭게 만들어준 방패가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앞으로 마블의 영웅들이 블랙 팬서를 통해 각종 비브라늄 무기를 장착하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블이 지난해 내놓은 세 편의 영화는 이들이 그간 내놓은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유쾌하고 코믹해 마치 '인피니티 워'를 앞두고 보여주는 팬 서비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블랙 팬서'는 전작들과는 달리 유독 엄중하다. 마블식 유머도 있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흥겹지만 어딘가 비장하다. 마블의 10년을 정리할 '인피니티 워' 개봉까지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블랙 팬서'가 미리 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