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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Feb 01. 2018

두 백전노장의 품격

영화 '올 더 머니'

 리들리 스콧(81) 감독의 빛나는 필모그래피 사이에서 그의 새 영화 '올 더 머니'(원제:All the Money in the World)가 차지하는 자리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가 내놨던 걸작들과 각종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비교해보면 어느 석유 부자의 손자가 납치당하는 이야기 정도는 소품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다만 압도적으로 뛰어나지 않고, 규모가 크지 않다는 말이 이 영화가 그저 그런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건 리들리 스콧의 영화다. 다시 말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더 머니'에는 40여년 간 세계 영화계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거장의 노련한 터치가 있다.


 '존 폴 게티'(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석유 장사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돈을 번 사람이다. 어느 날 그의 16살짜리 손자 '폴 게티 3세'(찰리 플러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괴한들에게 납치 당한다. 게티의 돈을 노린 그들은 손자 폴의 어머니 '개일'(미셸 윌리엄스)에게 전화해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한다.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오는 대가로 남편과 이혼하면서 단 한 푼의 위자료도 받지 못한 개일은 시아버지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게티는 그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도 "단 한 푼도 돈을 줄 수 없다"며 개일의 부탁을 거절한다.

 스콧 감독은 존 폴 게티(1932~2003)의 실화에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관객이 가장 좋아할지 잘 알고 있다. '올 더 머니'는 크게 보면 폴 게티 3세 납치 사건의 전말을 다루는 범죄 스릴러이면서, 더 정확히는 '셀 수 없을 만큼 돈이 많다'는 할아버지 게티가 손자의 몸값을 내어주지 않은 이유를 따라가보는 심리 스릴러다. 다시 말해 손자 게티를 납치한 건 괴한이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납치범은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관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 게티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내놓을지 숨죽인 채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취사(取捨)를 구분하고, 기승전결을 구성하며, 캐릭터를 조각하는 솜씨는 과연 거장답게 유려하다. 스콧 감독의 일부 영화가 작품성 면에서 자주 논쟁거리가 돼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이견이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그의 영화는 어쨌든 재밌다'는 점이다. 그는 우주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면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 '마션' 등 화법과 목표가 전혀 다른 세 편을 내놓을 수 있는 창작자다. 공통 분모는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영화적 재미다. '올 더 머니' 역시 그렇다. 이 작품에 인간에 관한 깊고 예리한 성찰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압권은 존 폴 게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다. 스콧 감독은 케빈 스페이시가 성추문에 휩싸이자 그가 출연한 장면을 모두 걷어내고, 개봉을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재촬영을 강행했다(추가 비용 약 1000만 달러). 스페이시의 빈자리를 대체한 배우가 바로 플러머다. 1929년생 노장 배우는 식지 않은 연기 열정으로 7일 동안 22개 신(scene)을 소화하며 '올 더 머니'의 완성을 도왔고,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오는 3월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쓰리 빌보드'의 샘 록월과 함께 가장 유력한 남우조연상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플러머는 나즈막한 목소리와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그의 연기가 돋보일 때는 징글징글한 언행 사이로 약한 모습을 잠시 드러내보일 때다. 돈에 짓눌리다가 결국 돈이 되고만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들도 그랬고, 손자도 그랬다. 그 또한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는 걸 관객이 눈치채는 그 순간, 게티는 세계 최고 부자가 아니라 그저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플러머는 이처럼 배우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간다는 게 무엇인지 한 수 가르치는 듯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스콧 감독이 '올 더 머니'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요약된 한 장면은 게티가 손자와 로마의 옛 성터를 함께 걸으며 하드리아누스 같은 황제가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시퀀스다. 오늘 날 가장 강력한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그 돈 때문에 벌어진 납치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과거 한 때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제국의 수도인 로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게티가 언급한 황제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그가 살았던 성도 폐허가 돼 관광지가 된지 오래다. 이제 그 위대했던 로마 제국도, 권력도, 황제도 흔적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돈 혹은 부자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스콧 감독은 우리 나이로 올해 82세가 됐고, 플러머는 90세가 됐다. 베테랑이라는 말보다 백전노장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두 영화인은 매년 치열한 경쟁이 무한정 반복되는 그들의 세계에서 황혼을 훌쩍 넘긴 나이에 또 한 번 인상적인 작품을 내놨다. 이런 특별한 능력이라면 아마도 영화계는 그들이 만든 영화의 단점을 지적하는 걸 뛰어넘어 그저 좀 더 오래 살아 한 편의 영화라도 더 남겨놓기를 바랄 것이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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