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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Apr 05. 2018

싫어도 사랑해

영화 '레이디 버드'

모든 게 뻔하기 만한 이 동네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도무지 성격이 맞지 않는 엄마는 점점 더 밉기만 하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빠는 부끄럽다. 그렇다고 돈이 많기라도 하나. 좁고 어수선한 집은 친구 데려오기도 창피하다. 난 왜 이렇게 예쁘지 않은 걸까. 게다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흔해빠진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은 또 무어란 말인가. 교복을 입어야 하며 규율도 엄격한 가톨릭 고등학교 생활도 성에 안 찬다. 방법은 하나다. 내가 나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고, 어떻게든 이 지겨운 도시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가야 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엉뚱하고 유별난 어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물이다. 그의 대책 없는 고교 생활을 담은 소동극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이라도 커가며 어른이 돼 가는 한 여고생의 성장물로 볼 수도 있다. 배우 그레타 거윅(35·Greta Gerwig)의 연출 데뷔작인 이 경쾌한 영화는 어떻게 봐도 무방하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영화가 제법 진한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상대는 내가 싫어했던 모든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싫었던 예민한 소녀가 내가 싫어했던 그 모든 것에 바치는 연가(戀歌), 그게 '레이디 버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흑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의 생활 중 거윅 감독이 선택한 에피소드는 친한 친구에게도 쉽게 꺼내놓기 민망한 과거들이다. 앞으로 자신을 '레이디 버드'로 불러달라는 요청을 엄마가 거부하자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팔이 부러지고마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그때는 그렇게나 중요했다. 나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채우겠다는 그 선언과 발악은 유치하고 낯뜨겁지만, 그게 현재의 크리스틴을 있게 했다. 그러니 이 영화 제목은 당연히 '레이디 버드'가 돼야 한다.


 영화는 '지금 여기 내가' 어디서 왔는지 되내게 한다. 그때 그 레이디 버드는 어설픈 뮤지컬 동아리에 들어가 황당한 연기를 선보였고, 아빠가 부끄러워 교문 저 멀리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의 첫사랑은 어처구니 없이 끝났고, 낭만적일 줄 알았던 첫 번째 섹스는 시시했다. 잘생기고 허세넘치는 남자친구를 만들고 '돈 많고 잘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가장 친한 친구를 잠시 배신했다.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 어떤 이상향을 담았지만, 오히려 그 이름이 상징하는 건 오점 투성이 기억들이다. 그 일들을 모두 지나온 나는, 어쩌면 그토록 내가 싫어했던 것들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날 있게 해준 고마운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경쾌하다(거윅 감독은 이 영화를 일종의 '러브레터'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미워보일지도 모를 크리스틴의 좌충우돌 행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관객 또한 달리 커왔거나 커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서사를 위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끔 정렬해내는 건 '감독 거윅'의 비상한 능력이다. 진솔함과 정확함을 함께 가진 이 재능은 러닝타임 내내 박장대소하게 하다가 결국 뭉클한 가슴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리고 엄마가 있다. '레이디 버드'의 한 축이 크리스틴의 고교 생활이라면 다른 한 축은 엄마와의 관계다. 딸과 엄마가 시도때도 없이 상처를 주고받는 이 치열한 전쟁에 사실상 거윅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담겼다. '싫어하지만 사랑한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엄마는 딸의 허황된 생각들이 마뜩찮다. 꿈 많은 소녀 입장에서 엄마의 철저한 경제 관념은 구질구질해 보일 뿐이다. 날선 말을 주고받다가도 같은 취향에 어느새 눈을 맞추고, 서로가 속마음은 따뜻하다는 걸 알지만 괜히 외면해버리는 그런 관계가 크리스틴 모녀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이 최선이면 어떡할거야?"라는 질문에 엄마는 답을 하지 못한다. 한 두 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애증이 '레이디 버드'의 딸과 엄마 사이의 감정이다.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 새크라멘토나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고교 생활도 마찬가지다. 


 '레이디 버드' 속 성장에는 낭만적 감상이 없다. 그 이상한 마음, 싫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게 양립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 그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감정을 알게되는 게 성장이 아니겠냐고 거윅 감독은 말한다. 크리스틴이 지겨웠던 새크라멘토를 다시 떠올리는 건 그곳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는 걸 알게 돼서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 모든 흑역사들이 여전히 남아 숨쉬고 있다. 가장 큰 적이자 가장 큰 사랑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나를 키운 건 좋아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싫지만 사랑했던 것들이다. 그걸 알기에 이제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에서 스스로 걸어나와 자신을 그냥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할 수 있다.


 꿈의 도시 뉴욕에서 크리스틴의 삶도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는다. 뻔한 연애가 있고, 그보다 더 뻔한 숙취가 있다. 그곳에서 크리스틴은 또 한번 흑역사를 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또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뉴욕을 새크라멘토 못지 않게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렇게 흘러간다. 거윅 감독은 실제로 새크라멘토 출신이다. 크리스틴의 엄마가 간호사로 나오듯 거윅 감독의 엄마도 간호사였다. 학교 생활에 대한 묘사는 대개 감독이 창조한 것들이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가 보여주는 디테일과 사실감은 실제 거윅 모녀의 이야기라고 한다.


(글) 손정빈 뉴시스 영화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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