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밖 숭고한 고난을 향해

영화 '티나'가 택한 세 번째 세계는 어떤 곳인가

by 손정빈

영화 '경계선'의 마지막 장면에서 목격하는 건 주인공 티나(에바 멜란데르)가 그녀의 삶에 존재했던 많은 걸 잃었다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정돈돼 있던 일상은 완전히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단정했던 겉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티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무너져내린 것 같다. 그런데 이 에필로그에는 그래서 당연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몰락의 을씨년스러움이 없다. 대신 어울리지 않는 확신의 당당함이 서려있어 당황스럽다. 전락이 주는 좌절감에 휘청대고 있어야 할 티나는 어떤 의지에 따라 뜻한 대로 움직이는 듯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마지막 장면이 뿜어내는 기이한 에너지는 또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이번엔 첫 장면을 떠올렸고, 이것이 마지막 장면과 정확히 배치(背馳)된다는 걸 확인했다. 프롤로그 또한 티나의 모습. 출입국 세관 직원인 그녀는 말끔한 유니폼을 입고서 정박 중인 대형 여객선을 바라보다가 발 앞에 있는 벌레 한 마리를 집어들고, 내려놓는다. 특별히 이상할 게 없는 일상이라면 일상인데, 벌레를 잡은 그녀의 손에는 묘한 망설임이 엉겨붙어 있는 듯하다. 이를 강조하듯 카메라는 일부러 초점을 잡지 못한다. 티나에겐 질서의 겉모습과 혼란의 속마음이 함께 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붙여놓고 보니 의도가 명확하다. '티나는 달라졌다.' 나는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2.jpg

이를 위해 우선 '경계선'을 삼등분 하기로 했다. 첫 부분은 티나가 보레(에로 밀로노프)를 만나기 전까지다. 다음 부분은 티나와 보레가 함께 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은 뒤 헤어지기까지. 마지막 부분은 보레와 결별 이후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단순한 플롯의 영화를 굳이 토막 낸 건 각 덩어리가 티나의 특정한 선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계선'은 티나가 세 번 선택하는 이야기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티나가 자신의 선택을 두 번 번복하는 이야기다. 앞서 언급한 마지막 장면은 두 번의 기각 끝에 얻은 최종 결론이다. 각 두 차례 선택·번복의 인과를 따라가 보면 마지막 선택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정체를 드러낼지 모른다.


"난 그냥 누구라도 내 곁에 있는 게 좋아." 티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를 병문안 갔다가 그녀와 같이 사는 남자 롤랜드를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티나는 추녀다. '경계선'이라는 제목처럼 그녀의 외모는 인간과 괴물 경계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쏟아지는 욕설과 모욕, 혐오 섞인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게 티나의 집이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유이고, 그래서 그녀는 외롭다. 집도 돈도 없는 롤랜드는 티나의 깊은 고독을 활용해 그녀의 집에 기생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티나도 모르지 않지만 이 금치산자가 세계와 그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같은 것이어서 그를 내쫓을 순 없다.


이게 티나의 첫 번째 선택이다. 그녀 스스로 규정하듯 "염색체 결함이 있는 못난 인간"이어서 멸시받고 고달프지만, 어떻게든 사회 구성원이라는 경계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 그녀는 착한 딸이자 친절하고 관대한 이웃, 현신적인 직장인이 돼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뛰어난 후각은 그녀가 이 경계선에 매달려 살게 해주는 일종의 무기로 보인다. 세관 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건 냄새로 법에 저촉되는 물건을 소지한 이들을 걸러낼 수 있어서다. 가령 허용 범위를 벗어난 양의 술을 반출하려는 사람이나 아동 포르노를 가진 사람. 티나는 "죄책감과 분노, 수치심의 냄새를 맡는다"고 말한다.


티나가 수십년간 유지해온 이 첫 번째 선택은 보레를 알고난 후 흔들린다. 그날도 어김없이 세관 업무를 하던 티나는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보고나서 놀란다. 그가 자신과 매우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어서다. 냄새는 나지만 짐에는 이상이 없고, 그는 "또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얼마 뒤 또 나타난 그 남자. 이번에도 냄새가 나서 그의 짐을 뒤졌으나 이상이 없고, 티나의 요청으로 세관 동료가 신체 검사까지 하지만 몸 안에도 의심할 만한 게 없다. 그런데 동료가 이상한 말을 한다. 그에겐 남성이 아닌 여성이 있다고, 꼬리뼈 쪽엔 흉터가 있다고. 앞서 티나가 계곡에 몸을 담글 때 목격됐던 바로 그 흉터다.

"당신은 누구죠?" 티나가 그에게 묻는다. 첫 번째 선택을 상징하는 문장이 "난 그냥 누구라도 내 곁에 있는 게 좋아"였다면, 이 질문은 앞으로 있을 티나의 두 번째 선택과 연결된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과 모든 면이 닮은 그에게 던진 물음은 곧 "난 누구인가"라는 자문이다. 내 존재에 관한 의심은 '염색체 결함이 있는 못난 인간'으로 정의된 첫 번째 선택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그는 이상한 답변을 한다. "난 여행 중이에요. 한곳에 잠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요." 그리고나서야 보레라는 이름을 알리고, 자신이 머물 호스텥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는데 가르쳐 준다. 이건 '내가(네가) 누군지 궁금하면 찾아오라'는 신호다.


외로운 티나는 보레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티나는 혼자되기 싫어 자신을 혐오하는 이들에게라도 인정받으려고 발버둥 쳤으나 사회는 그녀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밀려나고 또 밀려나 한 쪽 발은 사회 경계 안에 간시히 걸쳤으나 다른 쪽 발은 경계 바깥에 있는 상태. 티나가 국경에서 일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보레는 티나가 혼자가 아니란 걸 확인해주는 존재다. 티나와 닮은 보레는 티나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도 있기에 그녀가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설령 사회 경계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더라도 교감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보레가 건넨 구더기를 티나가 먹는다. 이건 티나가 자신을 배제하려는 세계에서 제 발로 걸어나와 사실상 보레의 세계로 넘어갔다는 걸 의미한다. 이게 두 번째 선택이다. 이제 첫 장면에서 티나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보통의 인간과 다르게 벌레를 먹고싶어 하면서도 그가 속한 세계의 룰을 따라야 하기에 내려놨던 것이다. 본능에 따라 벌레를 입에 넣었다는 건 기존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첫 번째로 선택한 삶을 번복하고 두 번째 길에 진입했음에도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티나에게 보레는 말한다. "당신은 결함이 없어요. 당신은 완벽해요. 인간들의 말은 듣지 말아요."


번개가 무서워 식탁 밑으로 숨었던 티나는 같은 두려움에 떠는 보레와 함께 밤을 보낸 뒤 완전한 동질감을 느끼고, 억제했던 본능을 해방한다. 숲과 계곡에서 자유를 만끽한 티나에게 보레는 진실을 공개한다. "우리는 트롤이에요."(트롤은 토르의 번개를 두려워 한다) 과거에는 트롤 숫자가 꽤 됐으나 인간이 그들을 도륙하고 실험 대상으로 삼았으며 현재는 극소수만 남았다는 것. 꼬리뼈의 상처는 인간이 꼬리를 자른 흔적이라는 것. 이 정보는 티나를 보레의 세계에 더 빠져들게 한다. 평생 인간에게 혐오받으면서 살아온 삶이지 않은가. 마침 아동 포르노 제작자를 찾는 수사에 투입돼 특유의 후각으로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일조하면서 인간의 역겨움을 목격했던 참이었다.

5.jpg

이건 익숙한 이야기다. 억압받던 존재가 조력자를 만나 자신을 구속해온 것들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한다는 성장담. 친숙한 사례 중 하나는 박찬욱의 '아가씨'다. 히데코는 숙희를 만나 백작과 코우즈키가 상징하는 남성 세계를 함락하고 자유와 사랑을 얻었다. 티나도 일단 이 길을 간다. 그리고 외로워서 외면했던 냄새를 맡는다. 그녀는 트롤의 진실을 숨긴 아버지를 찾아가 분노를 쏟아낸다. 티나는 그에게서 죄책감의 냄새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롤랜드를 집에서 내쫓는다. 그에게선 수치심의 냄새가 났을 것이다. 이제 티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서사의 주인공처럼 보레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된다. "힘든 삶이에요." "그래도 아름답겠죠?" "무척 아름다워요."


여기서 그쳤다면 '경계선'은 독특한 설정의 평범한 영화로 남았겠지만, 알리 압바시 감독은 멈출 생각이 없고, 또 한 번 티나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두 번째 세계, 그러니까 보레가 있는 세계의 깊은 어둠 또한 드러내는 것이다. 보레에겐 인간 종(種) 전체를 향한 깊은 증오와 혐오가 있다. 그는 인간 아기를 훔쳐 아동 포르노 제작자에게 팔아 넘기는 방식으로 복수한다. 훔친 인간 아기의 자리는 자신이 낳은 히시트로 대체한다(트롤은 인간의 남녀와는 다른 성(性)을 가지고 있다. 티나는 여성으로 보이지만 인간 남성의 성기와 유사한 것을 가졌고, 보레는 남성으로 보이지만 인간 여성의 것과 비슷한 성기를 가졌다. 히시트는 인간 아기와 유사하게 생긴 불완전한 생명체다).


그러니까 티나가 개입한 그 아동 포르노 사건은 그녀가 버린 첫 번째 세계에서 벌어진 역겨운 사건이 아니라 그녀가 선택한 두 번째 세계 또한 개입한 합작품이다. 보레의 세계 또한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이제 티나는 또 한 번 외로워서 외면해버린 보레의 죄책감과 수치심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녀는 보레에게 말한다. "당신은 아파요." 어떡해야 하나. 티나가 고민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에게 따뜻한 몇 안되는 인간이었던 이웃 에스테르의 아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히시트가 놓여 있게 된 것. 보레는 티나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여객선에서 만나요."


티나는 보레와 함께 떠나지 않음으로써 결국 두 번째 선택을 기각한다. 함께 가자는 보레의 제안을 물리치며 티나가 말한다. "악마가 돼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누구도 해치기 싫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인가요?" 이 대사는 아마 그녀의 세 번째 선택을 상징할 것이다. 자신을 향한 혐오에 고통스러워 하며 첫 번째 세계를 떠났고, 대안이 될 거로 여겼던 두 번째 세계에도 이전 세계와 다르지 않은 종류의 증오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티나가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럼 그녀의 새로운 선택은 무엇인가. 일단 티나는 두 세계에서 쓰였던 티나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원래 이름 '레바'를 되찾는다.


몰락 속에서도 어떤 것도 잃지 않은 듯한 에필로그 속 티나는 레바다. 레바는 숲 속 깊은 곳에 유폐됐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녀는 너무 외로워서 어떤 냄새는 맡고, 어떤 냄새는 맡지 않았다. 그 실책을 반성하듯 아주 공평하게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듯하다. 아마 그녀는 자신에게서도 죄책감과 분노와 수치심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면 외로워져야 한다. 혐오와 증오의 경계선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고독도 견뎌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숲과 집(폐허로 보이지만)을 오가고, 맨발에 벌레를 먹으면서도 옷을 입고 있다는 건 트롤과 인간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도, 보레의 세계도 아니다. 세 번째 선택은 레바의 세계다.

3.jpg

나는 '경계선'이 한 가지 방향에서 해석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 영화가 뛰어난 이유가 바로 그러한 다양한 시각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정치 영화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티나(레바)가 속했던 일부 세계와 그녀의 선택이 자꾸만 실패하는 모습이 한국 정치 상황을 강하게 연상했기 때문이다. 특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시작된 내 편이 아닌 이들을 겨냥한 배제와 혐오와 증오와 복수의 정치는 정권이 뒤바뀐 현재까지 십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1987년 체제 이후 우리 정치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심지어 퇴행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음 세대다. 혐오는 아무 잘못이 없는 인간 아기에게 고통을 줬고, 마땅히 온전한 생명이 됐을 수도 있는 어떤 존재를 불완전한 생명체(히시트)로 남게 했다. 티나가 자신이 속했던 세계들과 작별하고 레바가 된 건 증오가 낳은 결과를 환멸했기 때문이다. 이때 레바에게 도착한 의문의 트롤 아기는 아마도 상대를 어떻게든 배제하려는 세계를 떠나야만 마주할 수 있는 희망으로 보인다. 그 아기는 꼬리가 잘리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을 향한 복수의 도구로 쓰이지도 않을 것이다. 티나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계를 절단해놓은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고단한 길을 택하자 건강한 다음 세대가 탄생한다.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연대의 싹이 움튼다.


(글) 손정빈

이전 07화도저히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